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
느린 음악에 막춤 추기 #1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언젠가 한번 써보고 싶었다. 그런 글을 작정하고 쓰게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얼마나 길게 쓸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민할 필요 없이 고치지 않고 애써 꾸미지도 않고 일필휘지로 제자리에서 술술 써 내려가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냥 알고 있는 단어들을 떠오르는 대로 일일이 나열하는 방법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어떤 글을 쓰게 되든 문장이라는 것은 그만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이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자꾸 피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쓰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 왠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쓰고 싶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에 애를 쓰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들을 둘 다 맞는 말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는 했지만, 글이라는 관념이 글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동시에 아무런 내용을 품지 않을 수 있지 않을 수 있다고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쓸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인위적으로 만든 미로에 개미 한 마리를 넣어두고 개미가 헤매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이 되는 심정으로 그냥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노트를 펴고 종이 위에 펜을 놀려 검은 글씨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그런 글을 쓰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이 그런 글을 쓰도록 만드는 근거는 아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이 독자들에게 아무런 감상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내용이 없는 글을 읽는 독자는 대체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혹은 왜 이런 글을 쓰는지부터 시작해서, 정교한 지적 유희인 척 하지만 기실 수준 이하의 작위적인 활동에 불과한 이상한 짓을 뻔뻔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거나 때론 잘난 척하지 말라고 비아냥 거리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읽고 아무런 감상도 없는 사람이 절반이나 된다면 사실 그것이 더 놀랄 만한 일 같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는 글을 일부러 어렵게 쓰려고 하지는 않지만 내가 쓴 글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글을 즉흥적으로 아무렇게나 전개하고 구조나 뼈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간결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한 문장에 온갖 생각들을 다 함축적으로 집어넣으려 한다는 소견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방문 전에 인터넷으로 조사해봐서 본인의 병세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눈 앞에 있는 의사를 불신하고 남몰래 진찰료를 과다하게 청구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평범한 환자인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얘기인데, 때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면 그냥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일인데 그럴듯한 조언으로 작가로서의 생명은 연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알맹이가 없지만 포장지는 화려한 키치적인 글에도 독자의 절반 정도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많은 작가들에게는 축복이다. 왜냐하면 독자는 글을 읽을 때면 글쓴이가 최소한의 지적인 수준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글을 통해 글쓴이의 생각을 엿보거나 짐작하면서 일종의 지적 교감을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실 그런 생각들 역시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 나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정말로 아무렇게나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일부러 어려운 글을 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고 싶은 것도 아니며, 독자와 일종의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문제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굳이 느린 음악에 막춤 추기라는 부제를 달아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해석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을 위해 짧은 안내판을 붙여둔 것이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쓰면서 아무런 감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역시도 일종의 내용이라 할 수 있어서 그렇게 글이 흘러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애쓰지 않는 것이야 말로 아무렇게 흘러가는 것의 진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단어를 덧대어 힘을 싣는 일을 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무소유를 소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내려놓기 위해 더 애쓰는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지난 몇 년간 몇 가지 주제에 몰두했다. 명상, 요가, 마인드풀니스와 같이 현대 사회의 질병을 완벽하게 치유해주는 묘약을 곁에 두고 마셔보려고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쉽지 않았다. 약간이라도 의무감을 가져야만 하는 모든 올바른 행위들은 일종의 내용이 있는 글과 같아서,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 혹은 마라톤을 앞두고 최소한 유니폼에 후원자의 이름을 써두기는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트렌디한 단어들을 고르고 인과관계나 선후관계가 맞지 않더라도 그럴듯한 문장을 쓴 뒤에 시크한 표정으로 마침표를 찍는 행위는 정말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없는 듯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