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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Aug 07. 2021

서른셋, 안면마비

서른셋, 안면마비 #1

   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평생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몰랐다. 어떤 일이든 달성할 만한 적당한 목표를 세워서 힘들이지 않고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공부든 운동이든 그밖에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다. 지나치게 애쓰지 않았기에 1등이 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험은 벼락치기였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유년기를 보냈고 때론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남들과 동일한 성취를 할 때 더 쉽게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뭐든지 곧잘 해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시기나 질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고, 누구를 편들지 않고 중립을 지켰기에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았다. 나는 혼자 있으면 혼자 인대로 좋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거웠다. 궂은일을 할 땐 보람을 느꼈고 차라리 빼앗을 바엔 손해를 보자는 타입이라 다툴 일도 별로 없었다. 가족들은 건강했고 아내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가 없어 월급이 부족하지 않았고 직장생활도 순탄했다. 다양한 관심사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가끔 짜증 나거나 우울한 날도 있었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만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민거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일이 고민이었다. 해외영업을 하는 업무 특성상 전 세계와 동시에 일을 하려면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가끔 새벽에 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깬 적도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대응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잠시 화장실을 갈 때도 휴대폰으로 메일을 봤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나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온갖 부서에서 자문을 구한답시고, 미안하지만 어려운 부탁이랍시고,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를 찾았다. 그들은 점점 당연하게 부탁했다. 할 일이 태산이니 업무시간에 시시때때로 말을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나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내심 흉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게 스트레스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뭔가에 떠밀려 사는 기분이 들기는 했다. 딱 몇 달만이라도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쉬고 싶었다.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틈틈이 글을 쓰면서 애니메이션과 특수효과 기법, 작곡을 배우면 좋을 것 같았다. 이십 대에 꿈꾸던 일들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준비해서 PD가 되는  험난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해볼까? 마음이 늘 바깥에 있었기에 회사에서 훌륭한 실적을 내도 성취감을 느끼거나 내가 특별히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의 의미를 찾으려 사내 교육이나 파견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결국 회사를 나가지는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회사는 괜찮았다. 근무조건과 보상체계도 훌륭했고 스마트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수준 이하의 상황을 마주할 일도 다. 직장인이라면 사람 문제로 괴로워하는 케이스가 대부분 아닌가. 바쁘다가도 해외출장을 다니다 보면 리프레시가 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고작 떠밀려 사는 기분이 드는 정도면 행복한 직장생활일 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은 어지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올해는 호실적으로 몇 달치 월급에 달하는 인센티브를 받을 예정이었다. 여전히 바쁜 일과가 계속됐지만 주당 근로시간은 점점 줄었고 어떤 때는 40시간을 겨우 채우는 때도 있었다. 밤늦게 전화가 오는 일도 점점 드물어졌다. 그러면서도 만년 적자 영업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켰고 심지어 사상 최고 실적을 냈다. 회사에서 쌓아온 모든 경험과 경력이 꽃피는 한 해였다. 신경  만큼 결과도 좋았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업무였으므로 회사에서는 최대한 격려해 주기 위해 노력했고, 포상도 주어졌다. 일을 완벽히 장악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과 차를 마시러 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도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내가 궁금해하지 않는 얘기들을 했고 주로 상사를 흉봤다.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저녁 약속도 제법 잡았다. 사람들에게 사용한 에너지는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고 서점에 가서 책을 읽으며 보충했다. 금요일이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고 주말마다 회사 동호회에서 운동을 했다. 대출금도 착착 갚아 나갔다. 곧 연말이었다. 올해는 꽤 순탄했다.


   10월 14일 수요일, 아침 회의가 있어 조금 일찍 출근했다. 요즘 긴급한 이슈로 바빴는데 마침내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이번 주만 지나면 급한 일도 끝난다. 당분간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드디어 긴 터널이 끝나고 평화의 날이 오는가. 긴장이 약간은 풀렸다. 이 날 오후부터 뒷골이 땅겼다. 거북목 증후군으로 인한 만성 신경성 두통을 겪은 적이 있기에 특별한 증상이라 여기진 않았다. 다음날인 목요일, 세수를 하는데 눈꺼풀이 자꾸 말려 올라갔다. 어제부터 당기던 뒷골이 더 아팠고 특히 귀 뒤쪽을 쿡쿡 찌르는 통증이 있었다. 밤새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어 좀 이상한데? 어떤 증상인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뇌와 관련된 문제일 가능성이 크며 안면마비의 전조증상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양치를 하는데 입이 안 다물어졌다. 치과에서 이를 뽑기 위해 한쪽을 마취했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쪽 얼굴이 안 움직인다. 헉, 진짜 큰일 났구나. 그렇게 맨날 아등바등하다 결국 이렇게 되다니.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찾아올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얼굴이 마비되는 병은 사극에서나 봤다. 나는 아직 삼십 대 초반이고 충분히 건강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도 아닌 데다 몇 년 전 고생한 것과 비교하자지금은 과로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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