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든 실질적인 것을 좋아한다. MBTI 중에 T가 100에 가까운 인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감정적인 것이 좀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 뭔가 감정적인 변화나… 성장… 을 기대한다면 뒤로 가기를 누르셔도 좋다. 물론 그런 부분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특히 검사에 관한 부분은 조선시대 춘추관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적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명백히 밝혀둔다. 읽는 사람이 많은 글은 아니지만 혹여라도 나로 인해 오해가 생기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경험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아무튼. 오늘은 내가 ADHD 치료를 위해 2020년 9월에 풀배터리를 받았던 후기다.
풀배터리를 받기 전, 그러니까 회사 근처 병원에서 급하게 카드값을 틀어막듯 콘서타를 처방받아서 먹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일로 알게 된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았었다.
“나 ADHD래. 그럴 줄 알았음. 내가 뭐랬음. 내 상사 말이 맞아.”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개XX 말이 맞을 리 없어. 업무가 많아서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 의사가 내가 ADHD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니까? 진짜 ADHD래. 다들 싫어도 참고 하는데 난 싫으면 안 참아져. 마감이 밀려."
"다들 너 정도의 산만함은 있어. 나도 그래.”
"넌 마감은 안 밀리잖아. 난 밀린다니까? 사회적으로 개판이 난다니까?"
“아니, 진짜 정확하게 검사해봤어? 어떤 검사를 해야 하는데?”
“검사해 볼 거고 안 해 봐도 거의 확실해. 설문지만 해봐도 거의 확정이래”
”야, 근데 원래 그런 거 체크하면 정상인 사람 세상에 없어. 설문지만 하고 어떻게 알아.”
“아니, 정상인 있어. 근데 그 정상인이 내가 아닌 거라니까?”
“아니, 설문지로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까. 괜히 ADHD라고 딱지 붙여서 마음만 안 좋아지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설문지 자체가 병원에서 주는 거야. 내가 체크한 거 바탕으로 전문의가 체크한다고. 그리고 진짜 내가 일상이 힘들고. 우선은 처방받아서 먹는 약이 미약하지만 도움이 되고 있어. 자세히 알면 치료 효과가 더 좋을 거 같아서 검사하는 거야”
“근데 그거 뉴스에서 보니까 일반 사람들도 먹으면 도움이 된다던데? 아니야, 너 정상이야.”
아, 진쫘!!!!!!!!!!!!!!!! 저기요!!!!!ㅇ<-<(기절)
지금 선생님들은 INTP환자와 그녀의 ENTP 친구의 대화를 보고 계십니다.
2주 만에 원고를 털고 있지만 당시의 답답함이 떠올라서 기절한 관계로 이 글은 여기까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손 이모티콘)
는 농담이고. 아무튼 저런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잘 살아온 것인지, 좋은 친구를 둔 것인지(당시 친구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내가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했다. 답답하지만 고마운 마음이라 생각한다.), 어디 내놓아도 욕 들어먹을 개 거지 같은 상사를 둔 것인지. 아니면 셋 다인지. 세상은 나를 ADHD로 부단히 인정해주지 않으려 했다. 지난 편에는 짧게 줄여 썼지만 처음에 집 근처 병원 의사도 상사의 말 때문에 너무 자신을 단정하지 말라고 했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그래서… 당시의 나에게는 아래 4가지의 팩트 체크가 필요했다.
내가 정말 ADHD가 맞을까?
상사의 괴롭힘과 같은 외부자극으로 인한 우울과 불안 때문에 산만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다른 정신질환 때문에 산만한 것은 아닐까?
결론이 뭐든 장기간의 치료를 요한다. 치료를 중단할 이유가 최소한인 병원이 있을까?
우선 4번은 전편에서 말했듯 집에서 거짓말 좀 보태서 앞 구르기 3번 하면 갈 수 있고, 의사도 제법 예리해 보이는 병원을 골랐다. 나머지인 1~3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바로 마음의 종합검진이라 불리는 ‘풀배터리’였다. 하지만 밝히지 않은 마지막 난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가 가진 편견과 안 좋은 기억이었다. 나는 풀배터리와 정신과 진료에 모두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처음 풀배터리를 받은 건 고3 때인 2007년의 일이다. 전편에서 억지로 엄마 때문에 정신과에 내원했을 때 받은 것이다. 당시의 내원은 마음의 준비는커녕 효도를 위한 것일 뿐, 자의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내원이 순탄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풀배터리까지 받으니 싫은 걸 참는 게 더더욱 힘들다는 어린 ADHD인 내게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당시에 의외로 내 검사 결과는 ‘정상’이라는 결과를 들었었는데… 이번에 받는 건 그 이후로 무려 13년 만에 받는 풀배터리였다. 솔직히 이번에는 ‘정상’이라는 결과지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검사를 앞두고 나는 꽤 긴장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정상’이라는 결과지를 받지 못할까 봐가 아니었다. (애초에 어디가 비정상인지를 알고 싶어서 간 거니까, 긴장할 이유가 안 됨.) 내가 긴장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낯 가리는 내가 낯선 임상심리사와 작은 상담실에서 몇 시간 동안 검사를 해야 한다.
게다가 그 검사가 꽤 반복적인 행동을 내게 요구할 것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ADHD환자를 지루하게 한다.)
과연 작고 소중한 집중력을 가진 내가 집중할 수 있을까? 집중을 해야 검사 결과를 제대로 받아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때는 내가 정신적으로 박살 나있는 시기였다. 아니, 근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저때 제 생각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아시겠나요? ‘집중 못해서 비정상’ 임을 알고 얼마나 집중을 못하는지 측정하러 가는데 그 와중에 그 검사마저 ‘집중 못할 것을 걱정’함. 이게 웬 말임?? 열린 교회 닫힘이세요?? 대체 이런 뇌세포 건강과 시간에 하등 도움 안 될 걱정 따위를 왜 한 걸까? 하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그런 걱정이 많았다. 근심 걱정 부자였던 시기기 때문에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쨌든 근심 걱정 만수르였던 나는 한 두 푼 하는 것도 아닌 검사료를 날릴까 우려하는 맘이 한 가득이었다. 아무튼 이런 걱정 한가득한 마음으로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나를 체크해야 의미가 있기에, 콘서타를 끊고 약 1~2 주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마침내 검사일. 역시나 이 글의 기조 그대로 반전은 없었다. 아, 결과 얘기는 아니고… 과정에서도 반전이 없었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었던 나머지 회피하고 싶은 뇌가 검사 시간을 지워버렸다. 나는 시원하게 지각을 해재끼며 검사실로 입장했다. 게다가 업무도 다 못 끝내고 가서 중간에 전화통화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집중을 잘해서 검사를 마칠 수 없다는 내 예상을 그대로 실현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처음 검사실에 들어가면서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일하다 와서요”
“네, 괜찮아요. 앉아서 숨 돌리세요.”
내가 숨을 돌리는 동안 임상심리사께서는 이미 정리된(…이때 정말 죄송했다.) 검사지를 한 번 더 정리하는 척 내게 시간을 벌어주셨다. 흐트러진 숨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검사를 시작했는데, 아뿔싸. 시작한 지 3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접어둔 휴대폰 창으로 메시지가 보였다.
‘작가님, 저 지금 편집하고 있는데 혹시 그때 주신 자료 중에 ~~을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당시 알바로 제작하고 있던 영상의 PD였던 걸로 기억한다. 밤새 찍어온 거 정리하고 편집까지 하고 있는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있겠나. 물론 없다. 그리고 그가 빨리 편집을 마쳐야 나도 내레이션을 쓴다. 결국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통화를 한 번만 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천천히 하세요.”
라고 상담사가 말해줬지만 나름 검사 경험이 있던 사람으로서, 이럴수록 시간이 줄어간다는 것과 모든 것이 관찰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상당히 쫄렸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 살면서 내 인생에312324564583920318번 정도는 있었던 것이 지각과 돌발상황이었다. 위에서 상당히 쫄린다고 했지만, 사실 진짜 마음은
‘아~~ 3x6~~ 될 대로 돼라~~~~’
정도였다. 아무튼 양해와 사과를 구하고, 재빠르게 PD에게 전화를 해서 소통을 마친 뒤, 나는 검사를 다시 받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제발 HTP(집, 나무, 사람을 그리는 그림검사) 같은 간단한 것이길 기도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첫 번째 검사는 내 지능을 판단하기 위한 웩슬러 검사였던 것 같은데, 나는 매번 궁금한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웩슬러가 지루하지 않은가? 참고 웩슬러를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풀어야 할 문제의 유형이 반복되면서 지루함을 유발한달까? 물론 처음에는 문제가 쉽지도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확확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유형의 문제가 반복되자, 문제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은 흐리멍텅하게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루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앞뒀을 때 터지는 내 전형적인 ADHD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눈앞의 초점이 흐려져서 자꾸 옆이나 다른 곳이 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시 내가 검사를 받은 곳은 지금까지 상담을 받고 있는 곳이었는데 거기 놓여있는 조그마한 인형과 교구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초능력을 쓰는 히어로 무비에서 시력이 좋아졌을 때를 표현하는 것처럼 인형의 미세한 질감까지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는데, 시험지만 보면 갑자기 난시가 심해진 것처럼 초점이 맞질 않았다. 마치 물이 잔뜩 떨어진 액정화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 눈에는 이상이 없고 잘 보였는데 그냥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임상 심리사가 가진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타이머가 내는 미묘한 기계소리도 들렸고, 창 밖으로 다니는 차… 그 옆의 길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대화소리와 갑자기 웃는 소리. 바람 소리. 건물 안에 있는 각종 기계들이 내는 노이즈.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코가 꽤 예민한 편인데 이제는 코까지 난리 법석을 일으키며 온갖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잘 나고 있던 임상 심리사의 은은한 로션 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 내 몸에 뿌린 향수와 섬유유연제, 로션 냄새. 아침에 발랐던 로션 냄새. 검사받기 전에 내가 잘 때 엄마가 요리했던 음식의 냄새가 옷에 또 배어있네? 아… 이거 너무 싫다고 환기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엄마는 왜 맨날 내 말을 까먹으시지? 와, 근데 나는 심지어 자느라 아침도 못 먹고 왔네. 진짜 레전드다. 배고픈데 검사는 잘할 수 있으려나… 아닌가, 나 배 안 고픈가? 문이 닫힌 상담실 내부의 묘한 탁한 공기 냄새. 여기 환기는 몇 시간에 한 번 할까? 원래 병원이 가진 냄새. 조금 낡은 벽과 문에서 나는 냄새 등등… 와!!!!!!! 진짜 미쳐버리는지 알았다. 이 모든 정보가 뇌에서 대동제를 벌인 듯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를 펼치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내 발은 열과 성을 다해 꼬물거리기 시작했고 펜을 쥐지 않았던 반대 손은 열심히 옷을 문지르다가 쥐어뜯다가 조물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겉보기의 나는 평소와 똑같았다. 아니, 얌전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왜? 이래 봬도 당시 ADHD 30년 차 이상이었던 나는 정말 프로페셔널한 조용한 ADHD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내 문제 푸는 속도가 느려지자 임상 상담사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재미가 없어요, 문제에 집중이 안 되네요. 하하하…”
그다음에 상담사가 뭐라고 했는지는 진짜로 찐으로 내 집중력이 끝나서 다음 주에 이어서 쓰겠다. 검사받은 후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는데, ADHD맨의 심정을 자세히 쓰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묘사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다음 주에 봅시다.
<1억 벌기 도전 활동 중간 점검>
ADHD로 글 써서 투고해 보기 → 저번 주에 너무 집중이 안 되었지만 1천 자를 썻고 오늘 완성했다. 나름 1~2주에 한 편씩 순항 중.
드라마 공모전 준비하기 →미루다가 한 달이 지났다. 공부할 겸 영화제 다녀와서 5월 한 달 해보자… (먼 산)
그 외 활동 찾아보기 →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나름 심리 콘텐츠라고 생각해서 주의할 점을 알아보고 싶었다. 현재 심리 콘텐츠 제작/매니징을 하고 있는 분에게 지지난 주 커피챗을 요청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 외 일하기 싫을 때마다 회사 일 외에도 딴짓 파워로 할 수 있을 만한 부업이 뭐가 있는지 자료조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