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우리 담임이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런 대응을 해서 옆 반 문학 선생님이 오셔서 저렇게 조율을 해줬고. 그때 발단은 정 OO가 담임에게 말대답하면서 시작됐고. 아 그런데 그 당시 체육선생님 이름이 뭐였더라… 뭐였지…”
헉, 버퍼링에 걸렀다. 기억력에 있어서 만큼은 자부했었는데 말이다. 순간 느끼는 당황스러움.
“조 OO!”
기억력에 있어서는 제법 경쟁할만한 상대였던 친구가 재빠르게 답변을 한다. 추억 들추기에서는 내가 항상 일인자였는데 말이지. 역시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래, 인정한다 친구!
정말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 그리웠던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짧은 기간이지만 여고 친한 베프 모임으로 이루어진 ONE 모임만큼은 빠뜨릴 수 없다. 5년 만에 만나는데도 어제 만난 듯 ‘잘 있었냐’는 인사치레조차 없다. 누가 정하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장소는 고등학교 부근 동네. 폭염과 차 밀림을 불평부터 시작, 최근의 일상에 이어 여고시절의 추억담들을 하나씩 꺼내며 기억력을 체크하기 바쁘다. 항상 나오는 레퍼토리인데 어쩜 항상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을까.
5년 전 모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종종 기억이 안나는 부분이 생기고 누군가가 그 답을 채워줄 때마다 핸드폰 노트에 적게 된다는 점이다.
기억을 먹고사는 일.
미래 지향적인 사고에 기반해저는 과거에만 머물려는 고인 물 같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타향살이를 하는 나에게 소중한 지난날의 기억은 ‘사막의 한 모금의 물’처럼 피폐해진 마음에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 같을 때가 많다.
그 순간 더불어 감사하게 되는 건 그 기억 속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회상하며 미소 짓는 날도 없었겠지.
방구석에서 숨어 나만의 노트에만 글을 끄적이던 내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죽어있던 네이버 블로그를 다시 열고, 티스토리란 것도 해보고, 브런치에도 도전하기까지 그 시작점을 추적해가다 보면 나이 들수록 ‘희미해지는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지 않을까.
고로 지우고 싶은 기억은 없다.
눈물범벅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날의 기억들도 지금에 와서는 한 없이 그리운 순수한 나의 젊은 시절이다.
“왜 써요? 뭐 준비하세요?”
취미로 내세우게 되는 글 쓰는 것, 책 읽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사실 나조차 정확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내 마음의 평온과 즐거움을 찾다 보니 ‘그냥 하게 되는 일’. 혹시 그 대답이 무성의하게 들릴까 그 이유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지우고 싶지 않은 지금의 모든 순간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혹시 모르지 않은가. ‘선망’ 혹은 ‘치매’라는 단어가 언제 내게 갑작스럽게 다가올지. 기억이 점점 더 흐릿해지는 날, 그때의 기분과 그때의 사람들을 꺼내보고 싶은 날, 이 글 또한 그날의 내 마음에 아련한 행복감을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