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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류된 인형팔이 리어카

희망 없는 희망보관소 <도바 위에 뜬 별 2부 2화>

by 손병호

구겨지는 그림자들


희망보관소 철문은 전체적으로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지만,

뭇사람들의 손때로 손잡이와 자물쇠 부분은

윤이 날 정도로 반질거렸다.


수없이 매만져진 자물쇠, 손때가 번진 철판, 그 위로 긴 쇠창살들.

검은색 철문은 마치 지친 짐승의 입처럼 천천히 벌어졌다 닫히며,
하루의 끝무렵이면 지친 얼굴로 돌아오는 리어카들을 차례로 삼켜 넣었다.


낮 동안 골목을 지키거나 떠돌던 손수레들,

그리고 밤장사를 마치고 새벽에야 돌아온 외롭고 피곤한 바퀴들이
그 철문 안에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어서는 것도 아닌,
그저 세월의 한쪽에 기대앉은 듯한 휴식이었다.


보관소 안은 리어카 바퀴에 바르는 그리스 기름 냄새와
녹슨 쇠붙이, 압류된 채 잊혀버린 잡동사니들에서 배어 나오는
큼큼하고 눅눅한 냄새로 가득했다.


문턱을 넘지 않아도 골목 어귀까지 그 냄새가 밀려 나와,
속이 약한 사람은 코끝만 스쳐도 구역질이 치밀 정도였다.


철문 안쪽에서는 수명을 다한 형광등이
깜박이며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불빛은 마치 세상의 무심한 눈처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빛은 있었지만 온기는 없었고,
그곳의 시간은 오래전부터 멈춘 듯 보였다.


저녁 해가 아미동 산복도로 뒤편으로 서둘러 넘어가고 있었다.
골목에 이어진 건물 틈으로 스며든 빛이 철문 가장자리를 스치며
가늘고 긴 칼자국 같은 선을 남겼다.
그 빛줄기는 잠시 머물다 녹슨 철판 위를 타고 천천히 번졌다.


리어카를 보관소에 밀어 넣던 사람들이
하나 둘 철문 옆 작은 출입문으로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그림자가 저녁 햇살을 받아
땅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허리가 반쯤 굽혀진 그림자들은
철문과 바닥 사이에서 예각을 이루며 납작하게 구부러졌다.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림자는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또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림자들이 천천히 허리를 펴며 멈춰 섰다.


무게를 견디다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처럼,
그 움직임엔 오래 쌓인 피로와 잔잔한 체념이 배어 있었다.


철문 위의 붉은빛이 서서히 물러나자,
골목은 조용히 저녁의 그림자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겨우 허리를 펴며 앞에서있는 그림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이구, 염소대가리 저 놈, 제발 누가 좀 안 잡아가나.”

다른 그림자가 전대 속을 뒤지며 담배를 찾았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제. 인형 장수 유 씨가 보관비 두달 밀렸다고,
리어카가 저기 붙잡혀서 며칠째 장사를 못 한다 카더라.”

또 다른 그림자가 코웃음을 쳤다.


“저기서 웃음소리 난 적 있나. 희망보관소는 개뿔이지.”

그 말에 주변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흩어졌다.


웃음이라기보다, 체념이 섞인 내뱉음에 가까웠다.

낯익은 노점상 하나가 손난로를 비비며 말했다.
“악어 형님 살아 계실 땐 저놈이 감히 저리 못했는데…”


대화를 끝마친 그림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젓거나

짧은 한숨을 삼켰다.


낮 영업을 마친 마지막 리어카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에는 밤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그 희미한 불빛이 녹슨 철문 위로 마치 부슬비처럼 내려앉았다.


압류된 인형팔이 리어카


인형장수 유 씨 아저씨 리어카가 압류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걱정이 되어 저녘내내 보관소 앞에서 기다리고있는중이었다..


철문 쪽으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유 씨 아저씨였다.

“유 씨 아저씨.”
내 목소리에 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힐끗 나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낡은 코트를 여미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닳은 신발 밑창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소리가 났다.

찍—찍—.


마지막 리어카를 맡기고 쪽문으로 나오던 노점상들 중
한 사람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또 무릎 꿇겠네…
유 씨, 저 양반 자존심 한때는 세더만.”


그때, 먼저 나와 있던 다른 노점상이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발로 짓이겨 끄며
보관소 쪽으로 가래침을 길게 퉤— 하고 내뱉으며 궁지렁거렸다.


“세서 뭐하노. 결국 지 리어카는 저 안에 있는데.
와, 오늘따라 바람이 살벌하네.


하루 종일 한 데 서 있었더니만 온몸이 얼었뿟다.
고마 가자. 우리가 남 걱정할 처지도 아니고.”

유 씨 아저씨가 철문 앞으로 좀 더 바짝 다가섰다.

두 손으로 철문을 붙잡았다.


굳은살과 잔 흠집이 있는 손등 위로
인형 포장지에서 묻은 반짝이 가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소장님, 문 좀 열어주이소. 오늘 하루만 좀 부탁하입시더.”

철문 안쪽은 잠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관증 끊는 소리와
보관소장 염소대가리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바람이 철망에 붙은 전단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단기 보관 가능’이라는 글씨가 파르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쾅―
내 발이 보관소 철문을 세게 걷어찼다.
금속 울림이 골목을 따라 길게 퍼져나갔다.
유 씨가 놀라서 나를 올려다봤다.


“소장님!”

내가 철문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요.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야지.

안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그렇게 모른 척합니까?”


철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잠시 뒤, 철문 옆쪽 작은 출입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염소대가리가 철문 위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볼은 마른 풀처럼 꺼져 있었고,

턱에는 듬성한 수염이 몇 가닥 남아 있었다.

입가엔 어설픈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한 사장, 니 지금 우리 철문 발로 찼다, 그거가?

계속 함 차봐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발모가지 함부로 놀리노?


야이 X발, 배웠다 카더만 배운 인간 하는 행사머리 좀 보소 ?

기본 예의라고는 파리 X대가리만큼도 없거마는.”


“예의라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가팔라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굴면 예의도 생깁니다.
유씨아저씨 손 좀 보이소. 얼어붙은 손으로 문 붙잡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리어카 하나 뺏기면 밥줄 끊기는 판인데
예의 타령하게 됐습니까?”


그가 팔짱을 풀더니 코웃음을 쳤다.
“밥줄? 웃기고 있네.
이 판이 원래 그래. 돈 떨어지면 문 닫고, 보관비 밀리면 압류.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고 순리야.”


“그래서 사람부터 짓밟고 보자는 겁니까.”


나의 신경질 적인 반응에 그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짓밟다니, 보소. 이 양반아,

진짜 짓밟히는 꼴이 뭔지 알고 그런 소리 하나?”


염소대가리는 싸늘한 눈으로 철문 너머의 유 씨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유 씨, 니 이런 식으로 사람 붙이고 오면,
될 일도 더 꼬인다 알제?”



나는 철문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우리를 보는 그의 비아냥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 사정 봐주면 안 된다니까.

내 창고가 어디 구세군 냄비로 보이나,
여긴 ‘희망보관소’야, ‘동정보관소’가 아니라고.

보관료 두 달 밀리면 압류, 압류 사흘이면 처분.

그건 내 맘이 아니라 계약서에 적혀 있지.우리는 그냥 계약대로 하는 거야.”


“사장님, 제발 한 번만… 이틀만 기다려주이소.
사흘 연속 비 와서 장사 망했다 아닙니까.
오늘 밤만 벌면 됩니다, 정말입니다.”


“유 씨, 이제 와서 대가리 숙여도 소용없다.
좋다, 오늘은 봐준다 치자. 근데 내일은?”

“내일은 꼭 냅니다. 오늘만이라도 좀…”

“내일도 비 온다 카면?
모레도 핑계 대겠지.
이틀, 사흘, 일주일… 그렇게 미루다 한 달 금방이야.”


그가 킬킬 웃었다.
“허허, 아저씨. 불쌍한 사람 세상에 천지 삐가리다.
다 봐주면 나는 뭐 먹고 사노?”

“사장님, 너무합니다.
저라고 장사 팽개치고 싶은 줄 아십니까.
내 리어카 안에 인형이 삼백 개나 있다 아입니꺼?
그거 못 팔면 식구들이 굶습니다.”


염소대가리가 코웃음을 쳤다.
“굶는 사람, 여기가 한둘인 줄 아나?
이 골목 좀 둘러봐라.
다들 보관비 밀리고 빌빌거려.
누가 더 불쌍한지 순서라도 매겨야겠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라고 유 씨, 니도 딱 깨놓고 생각해 봐라.


보관비 밀릴 정도면 그 리어카 접고
다른 일 찾아봐야 되는 거 아이가.
안 그래?”


유 씨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자,
소장은 유씨의 한숨을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세상은 냉정해야 돌아가는 거야.
정이 많으면 장사 못 해. 그게 현실이야.
내가 괜히 염소대가리 소리 듣는 줄 알아?
내가 안 그러면, 내 식구들이 굶어. 알겠어?”


그는 손바닥으로 철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그냥 가. 인형이고 지랄이고, 내일 싹 다 정리 들어간다."


유 씨의 어깨가 더 깊게 내려앉았다.
철문 안쪽, 희미한 형광등이 떨리는 창고에 유 씨의 리어카가 보였다.

인형 상자들이 덮개 안쪽에 반쯤 숨어 있고,

리어카 손잡이에는 오래된 파란 테이프가 감겨 있다.


그 손잡이를 잡고, 유 씨는 일년 365일, 밤늦게까지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먹자골목과

극장 골목을 돌며 목이 쉬도록 외치고 다녔다.


“공주님 나왔다— 어디게, 요기 웃는 눈이 있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연인들을 웃음 짓게 하는

그 리어카가 지금은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지나가다 이 사단을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 염소대가리 또 시작이네.”
“인간도 아닌 기라. 요새 노점상들 상대로 고리대까지 한다 카더라.
원금보다 더 내라 카이.”
“에이, 시발. 악어 형님 없으니까 이때다 싶어서 아예,노점상들 등골을 쪽쪽 빠네.”


잠깐 열려 있던 쪽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람에 흔들리던 전단지가 그 서슬에 휩쓸려
유 씨 발 앞으로 나뒹굴었다.

‘희망보관소 — 단기 보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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