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에 몰린 염소대가리 <도바 위에 뜬 별 2부 제3화>
리어카 보관 거부 사건.
“한사장,니가 내게 돈을 빌려준다고?”
“예, 아저씨. 급한 대로 당장 가서 리어카를 찾아옵시다. 야간 장사라도 다시 시작하세요.”
나는 유씨아저씨에게 돈봉투를 건넸다. 왕비다방 배영숙에게 빌린 돈이었다.
유 씨는 돈 봉투를 보더니, 두 손으로 밀어냈다. “한 사장, 니도 악어 그 양반 돌아가시고 난 뒤 장사를 거의 반 접다시피 하고 있던데 이 돈을 어디서 구했노? 내가 염치없이 받아가꼬 되겠나,. "
“아저씨.” 일단 리어카부터 살려야 합니다. 보관소장 말하는 품새로는 오늘까지 보관비 정리안하면 아무래도 아저씨 리어카와 물건들 다른데로 처리해버릴 것 같습니다. ”
그는 천천히 봉투를 당겨 갔다. 봉투를 가져가는 테이블위 손끝이 무거워보였다.
"이 돈, 가능한 한 빨리 돌려줄게, 고맙다 말 말고 달리 할 말이 없네.”
보관소 앞.
소장은 돈 봉투를 훑어보더니, 짐짓 심드렁하게 웃었다.
“봐주긴 해야지. 근데 다음부턴 이런 식으로 와도 소용없다. 규칙은 규칙이니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와 오래 말을 섞는 건 늘 손해였다.
철문이 열리자, 리어카가 삐걱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손잡이를 잡는 유 씨의 손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는 나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고맙다, 성호야. 오늘부터 더 열심히 뛰어볼게 ”
나는 유 씨 아저씨를 향해 힘내라고 주먹 쥔 오른 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그는 그걸 보며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리어카를 밀며 골목 저쪽으로 사라졌다.
달빛이 희미하게 깔린 도로 위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부산호텔 바로 아래 포차골목.
중동집 포장마차의 불빛이 주위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불경기 여파로 문을 열지 않은 포차들이 많아 겨울 골목에 먹물 부어놓은 것처럼 짙은 밤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팔이 내게 소주를 따르며 의논조로 말했다.
“친구야! 이대로는 안 된다. 내 생각엔 유씨 아저씨가 우리하고 가깝다고 작정하고 괴롭힌 것 같다. 그전에 미선 아주머니 건도 있고.”
술이 몇 순배 돌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커져 있었다.
말숙 씨가 젓가락으로 연탄불에 구운 대합을 뒤적이며 맞장구쳤다.
“저기는 보관소가 아니라 빨대야. 노점상들 피를 빠는 거머리가 따로 없어. 지난번에 우리가 좀 더 세게 나갔어야 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씁쓸한 단념이 섞여 있었다.
구 씨 형님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악어 형님 가고 없으니, 염소 대가리 지가 이 골목에서 왕노릇할라 칸다 아이가.
최근 몇 달 사이에 도바 자리 몇 개가 벌써 저 놈 패거리들한테 넘어갔다.
이렇게 한 사람씩 내몰리면, 다음은 우리다.
여기서 저 염소 대가리를 끊어내야 우리가 산다.”
나는소주잔을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악어 형님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지금은 구 씨 형님 말이 상책인 것 같았다.
더 이상 내몰렸다가는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들 제 이야기 잘 들어보이소.
구 씨 형님하고 대팔이 니는 내일, 시장에 오전 손님 없을 때 보관소에 리어카 맡기는 사람들 왕비다방으로 최대한 많이 모아봐라. 10시 반쯤 가능하겠제?”
“모이자카면 모이기는 하겠지만, 사람들 모아가꼬 으짤낀데?”
“내가 사람들을 설득해서 보관소 이용을 중단하게 할 거다. 앞으로 리어카는 골목에 그대로 세워두고 우리가 지킬 거다.
이제 보관소에 돈 한 푼도 갖다 바치지 않게 할 거다. 구 씨 형님 말대로 이번 기회에 염소대가리 숨통을 확실히 꺾어 놔야겠다.”
대팔이 시원하게, 잔 속의 반쯤 남아 있던 소주를 목구멍으로 털어넣었다.
“좋다. 성호, 니 말대로 그래 함 해보자.”
말숙 씨도 기분 좋게 마지막 잔을 비웠다.
“그러면 앞으로 집에 안 가고, 순번제로 리어카를 지켜야겠네.”
구 씨 형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추워 걱정이지만, 내 생각엔 장사 마치고 힘들게 보관소까지 리어카 밀고 갈 필요도 없고 하니,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사람들이 많이 뭉쳐 주어야 불침번 하기도 수월하고 효과도 빨리 날 건데, 그게 문제다.”
다음 날 아침.
국제시장 입구 골목은 손님보다 노점상들과 잡상인들로 더 붐비고 있었다.
수많은 IMF 실직 가장들이 먹고살 길을 찾아 노점상으로 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장뿐만 아니라 웬만한 동네 어귀마다 처음 보는 노점상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던 주부들조차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거리에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보관소장은 이 틈을 타 노점 의류 도매업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세를 규합하고 있었다.
“유 씨 아저씨 이야기 다들 아시죠? 어제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똑똑히 봤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밥줄을 계약서 종이 한 장으로 꺾어버리는 걸.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사실 겁니까?
그래서 오늘 이렇게 모이자고 한 겁니다.”
“그 이야기는 시방 우리가 다 알제라. 염소 그 양반이 심하게 허긴 했제. 근디 성호 동생이 무슨 좋은 수가 있을랑가?”
겨울로 접어들면서 팥빙수가 아닌 단팥죽으로 업종을 바꾼 호남향우회 총무 은 씨가 나를 보며 기대에 찬 눈길을 보냈다.
“방법은, 뭔 방법이 있겠어. 그렇다고 리어카를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워째든 오늘 모인 김에 무슨 수를 내긴 내야 할 거여.
올해 초 희망보관소가 부평보관소까지 사들이고 난 뒤부터 보관비가 너무 올라버린 거여.
이러다가 모텔비 못지않게 비싸질 것이여.”
복사본 가요 테이프를 파는 김 씨가 처음엔 약간 비관적으로 말하려다, 좌중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말꼬리를 우회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늘부턴 보관소에 리어카를 맡기지 맙시다.
각자 일을 마치면 짐과 함께 리어카를 골목에
그대로 세워두고, 우리가 번갈아 순서를 정해 지킵시다.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소얙의 회비를 걷어
그돈으로 경비를 채용하면됩니다.이제부터 보관료 낼 필요가 없어지는겁니다. ”
“맞다!” 뒤쪽에서 누가 소리쳤다.
“어제 그 꼴 보면서도 또 맡기면, 그건 우리는 보관소 밥이요. 병신이요 하는 기다!”
인형장수 유씨 아저씨와 같은 고향사람인 민기 아재였다.
환호와 박수가 있었다. 하지만 모임에 늦게 온 사람들 가운데 걱정스런 수군거림도 있었다.
“경찰 부르면 우짤라고.”
“보관소장 조카가 칠성파 쪽에 있다카던데. 괜찮겠나.괜히 건드렸다가 애먼 피 본다.”
"염소 대가리가 보통놈이 아닌데 호락호락당하고 물러 날라하겠나"
흔들리는 눈빛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돌아섰다.
그들의 두려움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다 같이 힘을 모아 머물러야만 했다
“남은 분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첫날부터 모두 다 함께하면 좋겠지만, 각자 사정이 있으니 빠지셔도 됩니다.
저희가 길을 낼 겁니다. 여러분은 동참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지금 여러분 주위 도바가 하나둘 희망보관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남는 것은 결국 보관비가 아니라, 값비싼 도바 사용료입니다.
우리 생활이 더 어려워지게 될 겁니다.
오늘 빠지신 분들은 제가 책임지고 다시 설득하겠습니다.”
대팔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우리도 이제 조직의 쓴맛을 염소 대가리에게 보여주는 기라.
이참에 고마, 염소 대가리든 소 대가리든 확실하게 그 놈의 모가지를 달아매 버리자.”
첫날 밤 추위는 너무나 매서웠다.
수은주가 하필 영하 8도까지 내려가는 밤이었다.
인적 끊긴 골목 끝.
얼음같이 차디찬 가로등 불빛 아래,
리어카 그림자들조차 꽁꽁 얼어붙어 꼼짝 않고 서로의 등을 기대며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는 리어카를 지키는 불침번 순번표를 만들었다.
이름 옆에 시간을 적고, 두꺼운 담요와 손난로를 여러 개 준비했다.
종이컵 라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졸지 마라, 형님아.” 대팔이 웃으며 구 씨의 어깨를 쳤다.
“형님 니가 자면 저 리어카들 다 바람난 년처럼 도망갈 끼다.”
구 씨가 허리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꿈속에서 염소 대가리가 와서 리어카를 압류한다 캐가지고, 내캉 대판으로 싸웠는 기라.
아이고 징글징글한 놈. 밉다 밉다 캣더니, 인자는 꿈속에서도 나를 괴롭히네.”
그렇게 첫날을 넘겼다.
둘째 날은 조금 덜 추웠다. 아니, 덜 두려웠다.
골목에 세워둔 리어카가 멀쩡히 아침을 맞는 걸 보고, 사람들이 눈빛을 바꿨다.
“이게 더 편하네. 매일 보관소까지 끌고 갈 일도 없고.”
“그래, 이카면 돈도 안 나가고, 우리끼리 지키면 되는데.”
“봐라, 성호 씨. 어제 저놈들 안 왔더나?”
그다음 날이 지나자 참여 인원은 절반을 넘기 시작했다.
보관소 소장 염소 대가리가 시장 골목을 오르내리며 사람들에게
괜히 시비를 걸고, 분을 삭이지 못한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날 오후,
드디어 소장이 보관소 지붕이 울릴 정도로 분을 못 이겨, 전화기에 대고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오늘 밤에 싹 다 정리해라 했지? 칠성파를 부르든 팔성파를 부르든 상관없다.
돈은 충분히 준다 말이다.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다 데리고 나가, 골목에 세워둔 수레들 몽땅 다 뒤엎어버리라 말이야.”
그가 누구에게 말했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 쪽도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했다.
리어카 자율 보관을 선언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염소 대가리의 하수인들이 나타난 것은 장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검은 점퍼, 날선 눈빛들, 슬쩍슬쩍 문신을 보여주는 기름진 목덜미, 어깨 여섯 명. 그들이 노점 골목길을 꽉 채우며 들어섰다.
“야.” 맨 앞의 남자가 대팔의 리어카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이게 니 자리 맞나? 말해봐라.”
대팔이 벌떡 일어섰다.
“야. 이기 겁대가리가 상실했나. 어디서 행패고.”
왕년에 권투를 했다는 대팔이가 눈에 핏발을 세웠지만, 혼자 대적하기에는 숫적으로 많이 불리했다.
주위 노점상들이 미리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내가 얼른 그들과 대팔이 사이를 막았다.
“그만두시죠. 장사꾼들 자리입니다. 여기서 소란 내면 양쪽 다 피해 봅니다.”
그중 한 놈이 손가락을 세워 내 어깨를 살짝 밀쳤다.
소주 한잔 걸치며 삼겹살이라도 씹다가 왔는지, 알코올 냄새에 역한 마늘냄새가 비릿한 체취와 함께 내 후각을 마비시켰다.
“어—쭈. 뭐야, 이 새끼는? 남의 바둑에 왜 니가 훈수 두세요, 응?”
그는 이유 불문하고 주먹을 내 턱선 쪽으로 날려 보냈다.
나는 잽싸게 어깨를 비틀며 그의 주먹을 피했다.
이들과 맞붙어서 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놈들과 너희들이 맞붙으면 무조건 너희들 손해다.
그놈들은 너희들 리어카 다 부숴놓고,
되레 너희들에게 몰매 맞았다며
조직과 연관 있는 병원에 입원해서 4주 이상 진단서 여러 장 들이댈 거다.
집단폭행 4주로 걸고 넘어지면 바로 구속영장 떨어지니,
너희들은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있다.
그놈들은 프로니까 절대로 말려 들지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해줄게.”
희망보관소에서 우리 쪽을 손보려고 한다는
내 걱정을 들은 칠근이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상황은 다급하게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첫 번째 주먹이 빗나가자 분을 못 참은 그가
두 번째 주먹을 연이어 내게 날려오는 순간이었다.
그 주먹이 내 면상을 향해, 피할 시간도 없이 바로 들어오는 찰나——
더 크고 검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탁 소리와 함께, 내 앞의 팔뚝이 허공에서 멈췄다.
날아오던 주먹은 새파랗게 피가 몰리도록 비틀려 있었다.
“좋게 말할 때, 니들 전부 내 따라와라.”
내 친구 칠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이 멎었다.
누구도 소리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나를 가격하려던 건달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손등의 힘줄이 잔뜩 부풀어 불끈솟아 있었다.
평소 약간 거들먹거리던 내 친구 칠근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앞으로 여기서 이딴 짓 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준엄했다. 그 서슬에 골목이 울렸다. 벽이 울렸다.
가로등의 금속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너거들, 내가 말로 할 때 들으면 다 살고 간다.”
말에는 시퍼런 살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건달 여섯을 뒤로하고, 혼자 먼저 성큼성큼 왕비다방을 향해 걸어갔다.
쿵, 쿵, 쿵— 다방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칠근이 발을 디딜 때마다, 오래된 나무 계단이 삐걱이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왕비다방 2층.
낡은 샹들리에 아래로 담배 연기층이 자욱하게 낮게 깔려 있었다.
한쪽 벽에는 마지막 남은 빛바랜 달력 한 장이,
창문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가끔씩 파르르 떠는 소리를 냈다.
건달 여섯 중 목에 문신이 있는 갈색 가죽잠바 차림의 한 놈만, 억지로 지은 애매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다른 놈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된 표정으로 서로 곁눈질만 하며 감히 앉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칠근이 의자에 푹 기대 앉았다.
의자가 약간 뒤로 밀리며 스윽—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마저 그 분위기 속에서는 사치처럼 들렸다.
칠근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건달들을 훑어보았다.
면도날 같은 시선이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가장 날렵해 보이는 목 문신 남자에게 멎었다.
“어이, 봐라. 니. 지금 너거들한테 작업 시킨 놈
좀 빨리 올라 와봐라 해라. 요 밑에 있다는 거 내 다 안다.”
건달들 사이에 작은 동요가 지나갔다.
두 놈이 동시에 전화기를 꺼냈다가, 눈치를 보고 한 놈이 다방 구석으로 가 고개를 급히 굽히더니 어디론가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다방 입구 문이 열렸다. 칼자국이 깊게 패인 이마, 어깨가 제법 팡팡한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그가 먼저 칠근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앉아.” 칠근은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어조가 높지도 않았는데, 방의 공기가 그 음절 하나마다 꿀렁거렸다.
그가 앉자마자, 칠근은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귀에 갖다댔다.
“철호야.”
그 한 음절이 다방 전체를 갈랐다. 건달 일곱의 얼굴에서 피핏가가 빠져나갔다.
이마 칼자국 있던 던 놈이 몹시 불안한 기색으로 황급히 일어났다.
‘철호’—칠성파 행동대장. 누구도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 이름이 마치 “여보세요”처럼 부드럽게 불렸다.
“니 지금 뭐 하는 기고.” 칠근의 위엄있고 느릿한 목소리가 다방 바닥을 얼어붙게 만드는것 같았다.
“지금 형님이 검찰 들락거리는 판국에, 애들 관리 이래밖에 안 되나. 노점 골목까지 더럽히고. 이게 니 수준이가.”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한 모금 흘렀다. 방금 일어섰던 ‘칼자국’ 덩치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지금 칠근이 앞에 서 있지만, 한줄기 불안한 마음이 전화기 안으로 쏠리고 있는것 같았다.
칠근이 한 박자 쉬고, 꽁초까지 타기에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털이에 대고 지그시 누르며 전화기에 대고
기가 찬듯이 말했다.
“야. 씨이바. 가오 안 서게 요새 너거들 불쌍한 노점상들 밑창 빠는 짓까지 하고 다니냐? ”
그때서야 전화기 너머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오해 마이소! 거기 아이들 우리 직계 아닙니다. 밑에 애들이 지들 멋대로 한 걸 겁니다. 우리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예, 제가 지금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제발… 회장님께 보고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 일단 알았다.”
칠근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난로에 올려둔 큰 주전자에서 ‘피이익’ 하는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모두에게 긴장을 풀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시 건달들 쪽을 보았다. 누구도 그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칼자국이 칠근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입술을 떼었다. “우… 우리는 그냥… 위에서 우리한테 시켜서—”
“무슨 말인지 안다. ” 칠근이 말을 잘랐다.
“앞으로, 두 번은 안 봐준다. 특히 당분간 내 옆에 이 친구가 길에서 넘어지기만해도 다 너거 책임이다. 특히 조금 전에 내 친구에게 주먹질하려던 놈. 니는 오늘 조상이 돌봤다 생각해라. 앞으로는 바로 손모가지 뿌싸뿐다. 알아들었으면 고마 세숫대야나 빨리 치우고 ”
별다른 협박도, 고함도 없었다. 건달 일곱은 조용히, 아주 빠르게 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지나갈 때 바람이 한 번 훅 들어왔다 나갔다.
다방 안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샹들리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대팔이 뒤늦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말숙씨가 언제 따라들어왔는지 물컵의 물을 마시며 배영숙 마담에게 소곤거렸다. “짜식들, 식겁했을 끼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꼬.”
다음 날. 보관소 앞은 조용했다.
소장은평소처럼 목에 뻣뻣이 힘을 주고 다니려고 하였지만,
어깨가 한 풀 축 쳐져 있었다..
우리 리어카들은 골목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불침번 순번표는 더 길어졌고, ‘밤 2시—4시’사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어제는 오랫만에 잠도 좀 잤다.” 구씨가 웃었다. “이제는 꿈에서도 압류 안 한다 아이가.”
대팔이가 리어카 바퀴에 구리스 기름을 묻히며
구씨 아저씨에게 뭐라고 대답했으나 겨울바람 소리에 묻혀버렸다.
나는 불침번 순번표에 펜을 얹었다.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날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름칸에 이제 빈칸이 없었다.
저쪽 골목에서 바람을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형 장수 유씨였다.
“공주님 나왔다—, 웃는 눈 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손을흔들었다. “이래 장사하는 게 다 니 덕분이다, 성호야.”
“아저씨가 버틴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이제부터 뭉쳐나갈겁니다.우리끼리.”
건달들이 칠근이 때문에 꽁지를 내리고 도망친 며칠 뒤,
우리는 왕비다방에서 다시 전체 회의를 다시 열었다.
떠났던 사람들이 거의 다 되돌아왔다.
떠날 때 눈을 피하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는 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 순번을 다시 정하고, 서로를 위해 힘을 합치면 좋겠다는 일반적인 당부만 했다.
그리고 대팔이가 최근에 만든 우리의 구호를 선창했다.
“우리가 지키면—”
대팔이가 말하자, 구 씨, 말숙 씨, 그리고 유 씨,
나머지 사람들의 후렴이 한꺼번에 터졌다.
“골목은 산다.”
그때 다방 벽에 걸린 카세트데크 라디오에서 팝송이 흘러나왔다.
멕시코계 미국인 여가수 티시 이노호사의 돈데보이 였다.
“나 어디로 가야 하리—.”
골목이 살아있는한 우리가 갈 곳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골목에는 안정이 찾아 왔지만 염소내가리가 내 개인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위해를 가할 기회를 호시탐탐노리고 있는 줄은 전혀 예상을 못하고 나는 마흔의 나이로 새해를 맞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