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개지면에 올리지 않은지 꽤 긴 날들이 지났다. 페이스북, 브런치 이런저런 관계들로 묶인 지인들이나 자매끼리 공유하는 단체 메시지 공간에도 필수적인 소통 이외에는 점조차 찍지 못했다.
왜?
여름 초입이었을까? 코로나 상황에서나마 오랜만에 몇 명이 만난 자리에서 그간 좀 핼쑥해진 모습의 A가 말했다. 몸이 아파 좀 힘들었다고. 혼자 있는데 아프니 평소에 아무렇지 않던 것에도 매우 민감해지더라며 친구와 있었던 일화를 풀어놓았다.
지역 활동을 함께하는 동지이자 도반으로 많이 친한 친구가 있다고. 그런데 하필 A가 앓고 있는 시기에 친구는 미리 예정해두었던 여행을 떠났다. 친구는 여행지에서 찍은 아름다운 풍경과 맛난 먹거리가 펼쳐진 식탁을 매일 찍어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내왔다. A는 두통과 기침으로 훌쩍이며 하루 이틀은 문자 울림이 짜증 나는 정도로 힐끗 넘겼다. 답을 달 여유는 없었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면서 수시로 보내오는 풍경을 참을 수 없어진 A는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상냥한 음성으로 반기는 친구에게 A는 화산처럼 쏟아냈다.
“너는 내가 아프다는데 걱정은 없이 그렇게 즐겁냐?”눈물 콧물 범벅으로 펑펑 울며 나중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화를 퍼붓고 끊어버렸다.
그날 밤 친구는 여행을 다 취소하고 득달같이 달려와 뭔가를 바리바리 꺼내놓고 싹싹 빌었다.
“너 아픈데 내가 무심해서 미안하다. 내가 풍경에 미쳐서, 나만 좋아서.”
그렇게 둘은 다시 우정을 회복했다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B가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는 말을 하지 못해서 멀어져 버린 친구가 있는데.”
B도 비슷한 경험을 말했다. 자신이 매우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있는 때 친구가 눈치 없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왔다고. B는 속에 말을 내놓는 성격이 아니어서 점점 응대가 줄다가 결국 답 댓글을 달지 않아 버렸다고. 그러다 그냥 멀어져 버렸고 지금은 안부도 나누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이럴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B의 목소리가 울컥 젖었다.
행복자랑은 하지 말라던가?
문득 누구나 볼 수 있는 지면에 뜬 내 글이 돌아봐졌다. 내가 행복해하는 시간에 최소한 가까운 이들의 일상도 편안했을지. .. 어쩐지 몇 사람 읽지도 않는 내 글이지만 자랑이나 잘난 척이 담긴 주절거림을 공개지면에 띄우는 게 주춤거려졌다.
페이스북이나 브런치에 성실히 올리는 분들의 글을 읽다 보면 번뜩하는 삶의 통찰이 담겨있거나 깊은 울림이나 위로기 되는 글이 참 많다. 내 글은 그렇지 못하다.
어제는 촌에서 살기 시작한 친구가 텃밭에서 수확해 보낸 꾸러미를 받았다. 정성껏 말리고 닦아 찧은 때깔 고운 고춧가루, 반들반들한 호박, 말끔히 다듬은 뿌리 긴 대파, 갓 캔 고구마, 옆집에서 줬다는 쪽파까지 정갈하게 다듬어져 왔다.
세상 여윈 지 한참 지난 친정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고마워하는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먹으라며 친구가 덧붙였다.
“맛있게 먹고 글 많이 써”
“허 가슴이 철렁해지네.”
팔리지도 않는 내 책을 누구보다 귀히 여기며 사서 주변에 돌리곤 하는 친구는 늘 내가 좋은 글을 쓰기를 응원한다.
파전에 새우젓으로 간한 호박볶음에다 모처럼 혼술을 두어 잔 마신 후 선선해진 밤 산책을 했다.
가끔 브런치에서 ‘작가님의 글을 기다립니다’는 등의 메시지가 왔다. 오늘 아침에도 내 게으름을 반성하게 하는 브런치 작가의 글이 카톡 하며 다가왔다. 이렇게 다시 인사를 전하는 것은 게으름이든 뭐든 침묵하는 작가를 채근해주는 고마움들에, 그리고 가을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