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풍로와 연탄
촌에서 나무를 때는 아궁이로 취사며 난방을 다 해결하다 70년대 후반 신정동에서 시작한 첫 서울생활에서 석유곤로 또는 풍로라고 부르는 조리용 기구를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석유 연료통 위에 삼발이를 놓고 냄비를 올린 뒤 다이얼로 심지를 조절해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붙여 취사를 했다. 다이얼로 불 세기를 조절하거나 끌 수 있고 부피나 무게가 부담되지 않아 옮기기도 쉬웠다. 부엌 연탄아궁이 한쪽 옆에 풍로를 놓고 찌개 같은 것은 연탄 불위에서 끓이고 불 조절이 가능한 풍로 위에는 밥을 짓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때로는 그을음이 슬어 냄비 바닥이 새카매지긴 했지만 쓰윽 닦으면 쉽게 닦여지긴 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야학에서 공부한 후 늦은 밤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연탄아궁이 옆에 올려놓은 수제비가 불어서 국물은 하나도 없이 따뜻함은 유지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밤에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제비를 먹고 가만가만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단칸방에 파고들어 고단한 잠에 빠지곤 했다.
80년대 들어 자취를 하면서도 오랫동안 풍로를 사용했다.
지금은 그때 살던 자취방이 어느 지점 인지도 찾을 수 없이 변한 목동에서 한동안 생활했던 때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길바닥 맨 땅 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새벽바람이 느껴지면서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의아한 순간, 퍼뜩 아 연탄가스구나! 깨달았다. 숨이 답답하니 살려고 문을 밀치고 나온 모양인데 계단을 기어 내려온 건지 떨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자취방은 밖으로 철 계단을 타고 올라간 2층 높이 정도였는데 다친 데가 없는 것을 보면 기어내려 간 게 맞을 것 같다. 이른 새벽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계단을 기어 올라가 벽으로 통하는 주인집을 향해 있는 힘껏 벽을 두드리니 주인아주머니가 달려왔다. 아주머니가 동치미 국물을 퍼와서 먹이고 창문을 열고 하는 동안 이상하게 치미는 서러움에 펑펑 울고 말았다.
요즘도 가끔 머리가 아프면 그때 마신 연탄가스 영향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연탄가스로 죽는 사고가 빈번하던 시대다.
긴 집게와 별 모양의 삼발이, 불을 덮는 무쇠 덮개, 불구멍을 조절하는 플라스틱 마개와 함께 주방 한 귀퉁이에 연탄이 포개어 쌓여 있어야 겨울이 든든했다. 까만 연탄구멍 사이에 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은 따뜻하고도 애잔했다. 미처 연탄을 들여놓지 못할 때는 옆집에서 꿔다 쓰고 갚기도 했다. 언덕 위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배달 기피지역이 되기도 하지만 넉넉히 쌓아놓을 형편도 되지 않아 집게를 들고 직접 두어 개씩 사다 나르는 경우도 있었다. 언덕길이 꽁꽁 얼면 타고 남은 연탄재가 으깨져서 미끄럼 방지용으로 길에 덮옆다. 하지만 자칫 연탄재 아래로 투명하게 반짝이던 얼음을 잘못 밟게 되면 꽈당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라고 한 안도현 시인의 시구가 큰 울림을 주었던 연탄의 시대는 이제 고깃집에서나 볼 수 있는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