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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Feb 26. 2022

젠더 프레임 속 자기소개 1편 by 정씨

페미니즘을 전적 옹호하기에 충분한 백그라운드는 나도 있다.

이 매거진에서는 외이례라는 작가명 아래, 다른 배경을 가진 세명이 각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을 써나갈 예정입니다. 이 자기소개는 그 세명 중 하나, 정씨의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이번 매거진의 첫 글로 어떤 주제가 좋을까 오래 고민을 했다. 다루고 싶은 주제들이 막연하게 여럿 있지만, 확실한 자기 정체성이 없이는 글 한 편을 확신 있게 쓰기 힘들 것 같다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해볼까 한다. 하지만 식상하지는 않은, 젠더 프레임 속에서의 자기소개랄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소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보며 스스로에 대한 확을 가져볼까 한다.



3녀 1남의 둘째인 나는, 모두 짐작하듯 막내가 남동생이다. 우리 엄마는 그 당시 우리에게 티는 안 냈지만, 딸"만" 셋을 낳아 시댁에서 사랑받는 며느리가 아니었고, 첫째에 이어 또 딸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많이 속상해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들었다. 막내의 별명은 "10년 만에"였다. 10년 만에 나온 아들이라 소중하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다. 시댁에서 주는 눈치에 크게 상관 않고 우리 부모님은 "아들 못지않게 딸을 잘 키우자"라는 생각이 있으셨다. 아들 못지않게 잘 키우자?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닌 듯싶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딸 셋이 특별히 차별받은 기억은 없다. 모델 같은 몸매의 인형을 가진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장난감들은 성별 선입견을 가질 만한 것들이 아니었고, 아주 풍요로운 시절이 아니므로 자연 속에서 즐겁게 뛰어 논 좋은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막내가 태어나 좀 크고 나서, 할머니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극명하게 다른 것을 눈치챘지만, 할머니와 그리 각별하지 않았기에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아버지가 조선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당시 엄마와 아빠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은 확실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시는 아빠를 위해 더 일찍 일어나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매일 준비하셨고, 아빠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셨다. 식사 시간은 가족들이 다 모이는 화목한 시간이었는데, 이제야 여섯 식구를 위한 하루 두 끼 준비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이나 해본다. 2인 가족 저녁 식사 준비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 가정 내 성역할이 확실한 환경이었지만, 환경보다 자녀들의 사고방식을 더 확실히 좌우하는 것은 부모님의 마인드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었다.


한 날, 우리가 잘 챙겨보던 티비 프로그램에서 여배우가 모터바이크를 타고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우리 딸들도 나중에 저런 오토바이를 타면 멋있겠다."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이 꽤나 인상 깊었는지 나는 최근까지도 모터바이크 구매를 희망했는데, 이런 식의 부모님의 말들이 모여 이건 여자가 하면 안 되는 것, 여자가 하는 것, 이런 통념된 선입견이 거의 없이 자랄 수 있었다. 또 언니와 나는 아빠 퇴근 시간에 맞춰 종종 마중을 나갔는데, 우리 아빠는 조선소 밖 울타리를 한 바퀴 돌며 우리에게 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학창 시절은 꽤나 평범했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이었는데, 친구들과 활동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했고,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 입는 것을 편안해했다. 반면 젠더 프레임 속에서의 에피소드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강도가 심해졌던 것 같다. 먼저, 중학교 1학년 때 기술가정 시간. 지금 생각해보면 기술 가정 과목에서 가정을 맡았던 선생님은 남아선호를 대놓고 하는 선생님이었다. 문맥 상관없이 그분은 한 날 이런 말을 하셨다. "남자 애들이 여자 애들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인물이 좋다. 그 이유는, 여자 애들이 남자애들처럼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못났겠느냐." 그때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뭔가 부당함을 느꼈다. 게다가, 이런 황당한 논리를 스스럼없이 학생들 앞에서 언급하는 때라니. 지금이라면 분명 학부모가 불만을 야기했을게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큰 편이라 교복이 매번 불편했다. 가능하면 티셔츠를 입고 단추를 다 풀고 입었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럼 놀랍지도 않게 가슴 부분의 단추가 헤져 달랑달랑거리거나 단추 사이로 속이 보이고는 했다. 진짜, 휴 교복이란. 다양성이 수용되지 못하는 옷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남자 애가 자기를 한 번 꽉 안아달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실실 웃으면서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겪은 첫 성희롱이지 않을까 싶다. 아참, 초등학생 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내 엉덩이를 꼬집고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게 최초의 성희롱이려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는데,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욕을 하며 할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아, 잘못된 행동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한 국내 조선소의 출퇴근 풍경. 여전히 조선해양산업은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출처 : 이데일리


이전의 일들은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모두 시시 껄껄한 얘기로만 보이게 되었다. 나는 아빠와 사는 곳의 영향을 받아, 조선해양공학과로 진학을 했다. 향후 진로가 남초현상이 두드러지는 조선소이다 보니, 전공 내 분위기도 다를 바 없었다. 수직적인 관계, 과하게 음주가무 하는 분위기, 그런 것들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몇몇 남자 선배들의 도가 넘는 언급, 행동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내가 그런 것들을 웃으며 넘겼지, 농담이라 생각하며 지나쳤지 하고 돌아보며 후회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양쪽에 여자 후배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 자기의 후궁이라는 둥, 몇 번째 여자라는 둥 부끄러움도 없이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했다. 노래방을 가면 여자 후배들 머리에 물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던 나는 참 어렸다.



메인 사진 출처 : Junior Chamber International St. Paul Closed After Gender Conflict — JCI Saint Paul (jcistpa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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