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이례 Mar 31. 2022

젠더 프레임 속 자기소개 2편 by 정씨

나 생각보다 더러운 경험을 많이 했구나

이 매거진에서는 외이례라는 작가명 아래, 다른 배경을 가진 세명이 각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을 써나갈 예정입니다. 이 자기소개는 그 세명 중 하나, 정씨의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대학 생활이 나의 사고방식을 쥐고 흔드는 줄도 모른 체 시간을 보냈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취업 전선에 나가기 전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가히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막 도착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안녕, 내 이름은 수현이야. 반가워." 뿐이었지만 호기 넘치게 2주에 한 번씩 있는 문화교류(aka 토론)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과 소통하고픈 노력과 친구들의 도움 덕분에 3개월 만에 대화가 가능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임에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는 것이다.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임의 마지막 날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아, 트램 종착역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놀다 보니, 트램이 끊겼고 여섯 명 정도의 무리였던 우리는 대여 자전거를 빌려 시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12월 말, 그곳의 날씨는 추웠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어느 누구도 자전거를 타고 시내까지 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는 길을 헤맸고, 한 시간은 족히 넘게 빗속을 달려 시내에 도착했다. 당시 남자 친구는 무리를 무사히 시내까지 가이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는지 선두에서 달렸다. 자전거를 그렇게 오래 타본 적이 없던 나는 추웠고, 지쳐 무리 끝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나를 케어하지 않는 것 같아 참 서운했다. 우니 나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자전거 뒤에 태워가기를 내심 바랐던 모양이다. 그러다 가끔 고개를 돌려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남자 친구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나를 지켜야 할 약한 존재가 아니라 한 성인으로 동등하게 대하는 구나"라고.


우리는 참 오래 장거리 연애를 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만나고 멀어지고 만나고 멀어짐을 반복하며 만남을 이어갔다. 2014년, 나는 어학연수와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소 내 품질관리 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현 남편은 1년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여성 품질관리자는 몇 없었고, 내가 일하던 업체에서는 내가 유일한 여성 검사자였기에 옷 갈아입을 곳도 마땅히 없어 추운 야외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어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낮잠을 자야만 했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건 현장의 텃세와 젊은 여자애라 무시당하고 바로 반말로 응대받는 분위기였다. 검사 시작에 현장 사람들은 나에게 검사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큰소리를 내며 던지듯이 나에게 전달하는 사람. 반말로 품질 문제를 흥정하는 사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현장 작업자.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작업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까지.


녹녹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다행히 이런 환경에서 나는 오기가 생기는 사람이었다. 더 깐깐하게 품질검사를 하고, 내가 내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도록 건설 스펙을 더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했다. 반말하는 대리에게는, "저기, 제 나이 아세요? 왜 반말을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그렇게 일에 있어서는 조금씩 인정을 받게 되었고, 현장 작업자들과도 접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같이 일하는 대리가 내가 고용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부장님을 찾아가 따졌었다는 고백을 했다. 지금 같이 바쁜 시기에 여자 애는 필요 없다고, 제대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인이 선입견이 있었고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마음속 아주 작은 불편함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한 사람의 선입견을 바꿀 수 있었다니 기분이 좋았다.


지금 봐도 뿌듯한 내가 일했던 드릴쉽 중 하나. 가장 높은 데릭 타워를 사다리 타고 오르며 한 비상조명 검사는 참 재밌었다. (사진 출처: Vessel Finder)

이 일을 너무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현재 남편 덕도 있었다. 지쳐서 퇴근하던 어느 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힘든 점을 줄줄이 나열했던 적이 있다. 이때 남편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그래도 그게 니 일이잖아."였는데, 순간적으로는 서운함이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너무 맞는 말이라 "그래, 내가 선택한 일이지."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좋은 일자리 제안을 받아 이직을 했고, 조선소와 컨소시엄을 맺은 일본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테크니컬 코디네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긴 역사를 가진 이 일본 건설회사는, "어나더 레벨"이었다. 배운 것도 많은 소중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찝찝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는 고위간부는 꼭 회식자리를 만들었는데, 여성 직원들만을 곧잘 초대했고, 회식 후 노래방 가는 것을 좋아했다. 노래방에서는 우리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하고는 했다. 도를 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분위기가 석연치는 않은 그런 에피소드랄까. 매니저들은 술이 과해지면 조금 선을 넘는 언행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고, 팀 내 꼭 여자 직원을 하나 두고 팀을 지원하도록 구성했다.


장 기분 나쁜 에피소드 두 가지 중 하나는, 일본 회사에서 오래 일한 나이가 지긋한 한국인 직원과 협업할 때였다. 이 분은 내가 예의가 없다며 아버지가 뭐하시는 분이고 나이가 어떻게 되길래 이렇게 무례하냐고 물었으며 나와 일하기를 거부했다. 언성이 좀 높아진 때가 있었는데, 내가 싹수가 없다고 침을 뱉는 시늉을 하기도 했고, 팀에는 비서급의 여자 직원을 두고 커피 타는 것을 시키고 본인 비위 맞추기를 원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내가 일본 출장에 나갔을 때인데, 회계 관련 일을 하시는 분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스고이"라고 했던 것, 내가 온 것을 환영하는 식사 자리에서 과음을 하시고는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가슴이 크다고 말하라고 시킨 것.




"나이가 어린, 여자"라는 타이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이 더 힘들다 생각했다. 참 오랫동안 국내 조선소의 에이스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내 맘 같지 않은 환경에 일에 열정적이었지만 행복하지는 못했고, 막바지에는 굉장히 신경질적인 내 모습을 발견했다. 모든 일에 방어모드가 켜져 있는 듯했다. 나 스스로가 더 존중받기 위해서 석사 과정이 더욱더 필요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그렇게 오래 갈망했던 조선소에서의 경력에 아쉽게 마침표를 찍었다. 여전히 장거리를 하고 있던 남자 친구와 재결합을 위해 2017년 벨기에로 향했고, 석사과정에 지원해 2017년 9월부터 공부를 시작하며 우리는 그렇게 주말 커플이 되었다. 한 2년 동안은 조선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되새기면 여전히 분노가 치밀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생채기 입은 나를 보며 스스로 놀랐지만, 분노가 치밀 때마다 잘 소화를 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 과정이 매번 즐겁지는 않아도 여러 번 곱씹으며 어떻게 더 잘 반응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마음속으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젠더 프레임 속 자기소개 1편 by 정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