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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Jan 05. 2021

휴가의 탈을 쓴 재택근무

남편의 재택근무가 육아에 미친 영향

말로 쌓인 일상을 살다가 문득 나의 하루를 빼곡히 차지하는 말이 궁금해졌다. 첫째는 아이다. 7시 30분에 일어나 애교-소리치기-눈 찌르기 삼종 세트로 남편과 나를 깨우는 아침부터, 온갖 장난감을 침대로 가져와 지칠 때까지 놀고 잠드는 저녁까지. 좋든 싫든 간에 입에서는 아이 이름이 떠나질 않는다. 둘째는 아 맞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이 이름이 아맞다인 줄 알 것이다.


실컷 장을 보고 돌아와 정리할 때면 '아, 맞다' 두부를 안 샀네. 아이 수면 조끼가 없어 한참을 찾다가 '아, 맞다' 어제 빨았지. 사촌언니에게 보낼 아기 옷상자를 보며 '아, 맞다' 또 깜빡했네. 이 자리를 빌려 우두커니 제자리를 지킨 상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급기야 이번 주는 출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누워있는 남편을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아, 맞다. 당신 오늘부터 휴가지?'


나는 안다. 내 생일을 제외한 12월은 쭉 야근이었는데 갑자기 휴가라는 건 휴가의 탈을 쓴 재택근무임을. 그래도 기사로 접한 재택근무가 우리에게 닥치니 놀라웠고 집에 계속 있는 남편도 신기했다. 둘이니까 육아를 덜겠다는 희망도 가졌다. 모처럼 실컷 잔 남편은 까치집보다 더 정교한 집을 머리에 지었다. 그리고는 '점심 먹을까?'. 이 한마디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어영부영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아침, 문서를 보내야 한다는 남편 말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빠가 있는 것을 인지한 아이는 서재 앞에서 '똑똑똑'을 외쳐댔다. 문을 열 때까지 무한 반복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풍선과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고 돌아오니 또 점심시간이다. 분명 하루가 지났는데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펼쳐졌다. 소름 돋는 데자뷔다.


합리화하며 아이에게 TV를 허락하는 저녁 시간. 남편이 거실로 나왔다. 이때다 싶어 냉큼 창고로 달려갔다. 평소 아이가 '이거 이거' 외친 장난감을 꺼냈다. 설명서를 봤지만 3번이나 실패한 장난감을 남편 앞에 살포시 놓았다. 아이의 헤드락 방해에도 끝까지 만든 남편은 저녁상을 차릴 때쯤 뚝딱 완성했다. '우와' 아이가 소리 질렀고 그 모습에 행복했다.


다음 날 아침, 주문한 소변기가 도착했다. '이제 여기에서 쉬하는 거예요.' 남편이 말했다. '네' 대답과 함께 아이가 기저귀를 벗더니 방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순간이다. 한 눈 팔다가는 며칠 뒤 소변이 오렌지 젤리로 바뀐 어마 무시한 일을 맞이할게 뻔했다. 불안한 나는 아이를 쫓아다녔고 이 틈에도 남편의 설명은 계속됐다. 쫓고 쫓기는 한 판을 벌이고 소변기로 달려간 아이는 '쉬쉬'하더니 첫 소변을 가렸다. 이럴 수가! 어제보다 큰 함성이 내게서 흘러나왔다.


마트를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맞다를 막으려 메모장에 기록한 물건이 다 지워질 때쯤, 남편은 '분유도 조금씩 끊어야지'하며 유제품 코너로 갔다. 우유를 줬지만 아이는 거부했고 저체중으로 태어난 게 미안해서 두 돌까지 분유를 먹이려 했다. 남편은 아이가 거부했던 우유 외에 다른 것을 고르라고 했다. 실패할 게 뻔했고 내키지 않았지만 앙증맞게 묶인 우유를 구입했다. 배가 고픈지 차 안에서 보채는 아이에게 급하게 우유를 줬다. '여보, 먹는다. 먹어! 성공이야!' 빨대가 신기한지 아이는 음미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의 낮잠과 밤잠 시간에 일을 몰아서 한 남편은 얼굴이 야위어갔다. 덥수룩한 머리, 삐져나온 수염, 바지에 묻은 밥풀은 남편의 찐육아를 보여줬다. 주말 저녁, 집에 있어보니 어떻냐는 물음에 남편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밥도 같이 먹고 부족한 잠도 잘 수 있어서 좋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당장 출근인데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 초조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정과 회사, 다 잘 해내고 싶은 남편이 측은했다.


나에게 남편의 재택근무는 일상을 새로운 말로 채운 시간이었다. 아이 이름으로 빼곡한 하루에 남편의 쉼표가 더해졌고, 한숨의 자리엔 감탄이 동행했다. 아이와 가던 길에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남았고,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하루를 가득 메웠다. 넓게 보는 남편 덕에 육아에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된 것도, 함께 기억할 추억이 쌓인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휴가의 탈을 쓴 재택근무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남편은 진짜 휴가를 신청했다. 이번 휴가도 동일하게 일주일을 받았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이번엔 집도, 회사도 아닌 병원에서 보내는 휴가는 것. 래도 작년 1월 1일 응급실행에 비하면 양호한 편 아닌가! 어느새 아빠보다 견고한 까치집을 지은 아이가 일어나서 나를 반긴다.


'살아서 보자'는 남편의 말이 집안 가득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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