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공부를 더하고 싶었다. 모은 돈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엄마는 그때도 여자가 많이 배워봤자 눈만 높아질 뿐이고 뭘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반대했지만, 나는 28살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결혼을 한 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박사 과정을 오롯이 내 힘으로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생활은 참 지독했다.
석사 과정 중 알게 된 친구 같은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 언니는 언니네 엄마한테 호구 딸인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언니, 저번에 산 가방 그거 언니네 엄마 줬다면서요?"
"응, 엄마가 시장 가방 같다고 자기한테 딱 어울릴 거라고, 나한테 3만원 주면서 새로 사라고 했어."
"언니, 그거 언니가 평생 처음 장만해서 애지중지 갖고 다닌 새 명품가방이었잖아요. 그걸 3만원 받고 줘요? 그게 호구지 달리 호구예요?"
"..."
직설적이고 여과 없는 그 말이 내심 서운했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를 피해 다녔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나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지금은 둘도 없는 소울 메이트가 되었다. 그녀는 항상 솔직한 화법으로 나의 상황을 직면하게 했다. 나는 엄마의 일방적인 연 끊음에 대한 그녀의 충고와 혜안이 필요했다.
그 친구는 나의 하소연을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니, 내 말이 서운할 수도 있어요. 언니 엄마에게 언니 동생은 환자예요. 도와주고 돌봐줘야 할 환자. 항상 걱정되고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하는 사람요.
아마 어릴 때도 약하고 자주 아팠겠죠. 그래서 더 정이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불행히 성인이 된 지금도 언니네 엄마는 여전히 동생을 놓지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언니 엄마는 아마도 언니를 돌봐야 할 딸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함께 양육하는데 필요한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여겼을 거예요. 자라면서 언니가 조금이라도 언니의 욕구를 말하려고 하면 '너는 괜찮잖아. 너는 더 낫잖아.' 그런 말 많이 썼죠? 몇 년 전 언니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잖아요. 그때도 언니 엄마는 언니가 힘들어하니 '우울증으로 죽을 사람은 벌써 죽었다. 넌 안 죽었으니 괜찮을 거다.' 그랬었다면서요."
"언니랑 동생이 똑같은 조건으로 같이 물에 빠지고 딱 한 명만 구해야 한다면, 언니 엄마는 동생을 구할 거예요. '너는 그 애보다 3년이나 더 살았잖아, 너는 애들이 좀 더 컸잖아, 누군가 널 도와주겠지...' 뭐 그런 식일 테죠. 그거 알아요? 언니네 엄마는 언니가 울어도 절대 젖 안 줘요.
편애는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대물림되는 감정이에요. 그러니 이제 이유기를 끝내야 할 때가 왔어요.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요."
나는 편애가 나의 아이들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다는 말에 명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릴 때 엄마는 너는 몸도 크고 뾰족해서 안으면 뼈가 아픈데, 동생은 둥글어서 폭삭하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항상 '등치는 말만 한 것이 동생이랑 똑같이 뛴다'라고 나를 야단을 쳤다. 나에게 너는 성격이 나쁘지만 동생은 뒤끝이 없고 성격이 둥글둥글 좋다고 했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나의 아이들과 동생의 아이들을 함께 만날 때면 나의 큰 아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다 큰 것이 잘도... 하다, 네가 큰 애니 참아라', 아이가 뛰기라도 하면 '등치도 커다란 것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어느 순간 나도 나의 큰 아이에게 너는 커서 안으면 무겁고, 둘째 아이는 곰인형처럼 부드럽다고 말했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큰 아이에게만 '너는 000 하니까, 참아'라고 했다.
엄마는 키도 크고 걸음도 빨랐다. 나는 보폭이 작아 엄마와 다닐 때는 뛰다시피 했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자신의 걸음 속도를 내게 맞춰주지 않았다. 엄마는 걷는 데 성가시다며 자주 내 손을 뿌리치고 먼저 갔다. 내가 뒤쳐져도 야단만 칠뿐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늘 엄마의 뒤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의 걸음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내가 구두를 신든 치마를 입든 무거운 물건을 들었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뒤처지는 나를 운동부족이라며 잔소리했다. 어느샌가 아이가 자랄수록 나 또한 큰 아이의 느린 걸음이 갑자기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빨리 걷자고 말하는 횟수와 비례하여 내 걸음 속도 역시 빨라졌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에서 엄마의 모습을 느끼고 소스라쳤다. 엄마의 편애가 심해질수록 내 인생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빠져나오고 싶어서 온갖 발버둥을 치지만 결코 쓰레기통 밖을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과 절망감이었다.
나는 마음을 아프게 했던 엄마의 차가운 양육태도와 편애가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