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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r 16. 2022

편애의 대물림 - ①


나는  공부를 더하고 싶었다. 모은 돈으로 대학원 진학하였다. 엄마는 그때도 여자가 많이 배워봤자 눈만 높아질 뿐이고  뭘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반대했지만, 나는 28살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결혼을 한 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박사 과정을 오롯이 내 힘으로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생활은 참 지독했다.


석사 과정 중 알게 된 친구 같은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 언니는 언니네 엄마한테 호구 딸인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언니, 저번에 산 가방 그거 언니네 엄마 줬다면서요?"

"응, 엄마가 시장 가방 같다고 자기한테 딱 어울릴 거라고, 나한테 3만원 주면서 새로 사라고 했어."

"언니, 그거 언니가 평생 처음 장만해서 애지중지 갖고 다닌 새 명품가방이었잖아요. 그걸 3만원 받고 줘요? 그게 호구지 달리 호구예요?"

"..."


직설적이고 여과 없는 그 말이 내심 서운했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를 피해 다녔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나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지금은 둘도 없는 소울 메이트가 되었다. 그녀는 항상 솔직한 화법으로 나의 상황을 직면하게 했다. 나는 엄마의 일방적인 연 끊음에 대한 그녀의 충고와 혜안이 필요했다.

그 친구는 나의 하소연을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니, 내 말이 서운할 수도 있어요. 언니 엄마에게 언니 동생은 환자예요. 도와주고 돌봐줘야 할 환자. 항상 걱정되고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하는 사람요.

아마 어릴 때도 약하고 자주 아팠겠죠. 그래서 더 정이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불행히 성인이 된 지금도 언니네 엄마는 여전히 동생을 놓지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언니 엄마는 아마도 언니를 돌봐야 할 딸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함께 양육하는데 필요한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여겼을 거예요. 자라면서 언니가 조금이라도 언니의 욕구를 말하려고 하면 '너는 괜찮잖아. 너는 더 낫잖아.' 그런 말 많이 썼죠? 몇 년 전 언니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잖아요. 그때도 언니 엄마는 언니가 힘들어하니 '우울증으로 죽을 사람은 벌써 죽었다. 넌 안 죽었으니 괜찮을 거다.' 그랬었다면서요."


"언니랑 동생이 똑같은 조건으로 같이 물에 빠지고 딱 한 명만 구해야 한다면, 언니 엄마는 동생을 구할 거예요. '너는 그 애보다 3년이나 더 살았잖아, 너는 애들이 좀 더 컸잖아, 누군가 널 도와주겠지...' 뭐 그런 식일 테죠. 그거 알아요? 언니네 엄마는 언니가 울어도 절대 젖 안 줘요. 

편애는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대물림되는 감정이에요. 그러니 이제 이유기를 끝내야 할 때가 왔어요.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요."


나는 편애가 나의 아이들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다는 말에 명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릴 때 엄마는 너는 몸도 크고 뾰족해서 안으면 뼈가 아픈데, 동생은 둥글어서 폭삭하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항상 '등치는 말만 한 것이 동생이랑 똑같이 뛴다'라고 나 야단을 쳤다. 나에게 너는 성격이 나쁘지만 동생은 뒤끝 없 성격이 둥글둥글 좋다고 했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나의 아이들과 동생의 아이들을 함께 만날 때면 나의 큰 아이를 가켜 이렇게 말했다. '다 큰 것이 잘도... 하다, 네가 큰 애니 참아라', 아이가 뛰기라도 하면 '등치도 커다란 것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어느 순간 나도 나의 큰 아이에게 너는 커서 안으면 무겁고, 둘째 아이는 곰인형처럼 부드럽다고 말했다. 이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아이에게 '너는 000 하니까, 참아'라고 했다.


엄마는 키도 크고 걸음도 빨랐다. 나는 보폭이 작아 엄마와 다닐 때는 뛰다시피 했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자신의 걸음 속도를 내게 맞춰주지 않았다. 엄마는 걷는 데 성가시다며 자주 내 손을 뿌리치고 먼저 갔다. 내가 뒤쳐져도 야단만 칠뿐 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늘 엄마의 뒤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의 걸음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내가 구두를 신든 치마를 입든 무거운 물건을 들었든 개의치 않다. 그저 자신보다 뒤처지는 나를 운동부족이라며 잔소리했다. 어느샌가 아이가 자랄수록 나 또한 큰 아이의 느린 걸음이 갑자기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빨리 걷자고 말하는 횟수와 비례하여 내 걸음 속도 역시 빨라졌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에서 엄마의 모습을 느끼고 소스라쳤다. 엄마의 편애가 심해질수록 내 인생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빠져나오고 싶어서 온갖 발버둥을 치지만 결코 쓰레기통 밖을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과 절망감이었다.

나는 마음을 아프게 했던 엄마의 차가운 양육태도와 편애가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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