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덕선이의 투정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일 당일은 아니지만 부모가 생일상을 안차려 준 것도 아니고 닭다리든 날개든 모두 같은 닭이며, 노을이나 덕선이나 부모가 이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매 한 가지라고. 그 정도는 가족 간에 서로 이해하고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장기적이고 상투적으로 행해진 부모의 소소한 편애는 차별당한 자식에게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주며 평생 동안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칼 필레머(Karl Pillemer) 교수는 그의 저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30 Lesson For Living)에서 부모의 편애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오래도록 남는다고 설명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부모와 관련해 지니고 있는 가장 폭력적인 경험은 덜 사랑받는 아이였다는 기억이다"(p.142).
필레머 교수와 그의 연구진이 진행한 1000명 이상의 노인들과의 인터뷰에서 노인들은 부모의 편애로 인해 겪은 일과 상처를 회상할 때 복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편애로 인해 차별받았던 자식의 서러움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 중 하나는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아직 세상에 대한 이해력과 면역력이 없는 아이를 안전하게 돌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를 필터 삼아 아이가 세상을 헤아려볼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즉, 부모는 아이와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부모의 일방적인 편애는 차별받는 자식에게 ‘부모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아니야’ 등과 같은 비합리적인 사고를 각인시킨다. 부모를 통해 투영된 세상은 불신, 단절, 고립, 외로움 등의 감정으로 아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아이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다양한 관계를 맺고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어린 시절부터 쌓여 아이의 무의식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게 된 이 부정적인 감정들, 애착형성 관계에 대한 불신과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애정결핍, 관계 집착, 우울증, 편집증, 불안, 고독, 낮은 자존감, 피해의식, 무력증 등의 문제로 드러난다.
편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나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엄마의 편애와 차별로 인해 조각나 부서진 나의 상처 난 감정들은 내 삶 속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나는 다정함 앞에서 울컥하곤 했다. 누군가의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다정함,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모든 방어기제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다정한 말에 갑자기 눈물을 흘려 상대를 당황시키는 일도 있었다. 나의 내면에는 다정함을 향한 인정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늘 사람의 온기를 쫓아다녔고 인정받고 싶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나'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공허했다. 나는 점차 우울이 깊어져 심리상담도 받아야 했다.
드라마 속의 덕선이가 겪은 편애와 내가 겪은 차별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수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보통의 편애였을지도 모른다.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해줄 수 없다면, 부모는 어느 아이를 지원해주고 어떤 아이를 희생시켜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누군가는가족의 결정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야 한다는 구조적 상황에서 당사자의 이해가 확보되지 않은 그 같은 결정권은 정서적 폭력과 다름없다. 편애로 인한 차별에 항변조차 할 수 없고 그저 입을 다물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콩쥐 팥쥐, 신데렐라 등의 동화에 나오는 학대에 가까운 편애만이 편애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드러나는 부모의일방적이면서 편중된 애정은 자식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편애의 고리는 다음 세대로까지 건네질 수 있다.
나의 엄마는 남아선호 사상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엄마는 아들을 향한 편애로 부모에게 소외와 차별을 경험하였음에도 그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부당함에 싸워나가는 대신에 도리어 그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너무나 무뎌진 나머지 엄마는 나의 울부짖음에도나의 상처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아들을 편애하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하였고 자신의 딸인 나를 차별하여 정서적 상처를 그대로 대물림하였다.
나와 다르게 드라마 속의 덕선이는 자신의 서운함을 받아준 가족이 있었다. 그녀가 편애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난 뒤 덕선의 아빠는 그동안 몰라서 그랬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생일 케이크를 새로 사다 준다. 아마도 그이후 덕선이는 매년 생일상을 따로 받았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통닭을 먹을 때 매번은 아니더라도 닭다리를 먹을 기회가 생겼을 것이며, 콩자반 대신 계란 후라이를 반찬으로 먹는 날도 이전보다 많아졌을 것이다. 덕선이는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어주는 가족이 있었으므로 편애로부터 얻는 상처를 기꺼이 극복했을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가 부러워졌다.
큰 아이가 물었다.
"엄마, 요즘 할머니가 왜 연락을 안 할까요?"
나는 아이의 말에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엄마가 나와의 인연을 끊었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아이와 할머니 사이를 어떻게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관계 단절이 나를 길들이려는 시도에 다름없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른들의 일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이해를 아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아이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어둡고 무거운 내용을 빼고 최대한 밝고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의 말이 끝나자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가끔씩 엄마가 동생을 더 많이 안아주는 것 같을 때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엄마가 동생을 더 예뻐하는 것 같아 질투도 났어요. 그래도 엄마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안아줄 때면 금방 마음이 좋아져요. 할머니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나는 아이를 가만히 안고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삶은 이렇게 계속된다. 나를 통해 이어지는 아이의 삶 가운데서 나는 증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