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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y 13. 2022

꽃 세 송이, 그리고 다정함


"카톡 카톡"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지금 집에 있어요?"

"네, 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언니, 집 앞으로 갈게요. 이따 잠깐 나오세요."

"네, 연락 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할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내 옷차림은 지금 괜찮은가...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음... 만나보면 알겠지' 나는 거울을 보며 얼굴과 옷매무새를 얼른 살펴보았다.


"카톡 카톡"

"언니, 지금 공동현관 앞이에요. 얼른 내려오세요."

카톡을 보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엘리베이터로 직행하여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OO 씨, 무슨 일 있어요?"

"꽃 시장엘 다녀왔는데, 언니 생각나서 집에서 다듬다가 급 포장해왔어요. 제가 포장한 거라서 좀 안 이뻐요."

수줍게 말하며 그녀는 등 뒤로 숨겼던 꽃 세 송이를 내게 건네준다.

처음 본 꽃이다. 외국에서 건너왔다는 그 꽃은 살포시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고마워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집에서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

"아이랑 같이 어딜 가야 해서요, 그냥 나가는 길에 들렸어요. 담에 봐요."

나는 꽃 내음을 맡아보고 그것을 아기처럼 소중히 안고 그녀와 아이가 눈앞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관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꽃 포장지를 벗기고 길이를 다듬어 물을 채운 화병에 꽃을 꽂았다. 허리를 숙이고 팔짱을 낀 채 탁자에 몸을 기대서서 구부러진 철사 모양처럼 생긴 노란 꽃잎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창문을 넘어온 바람결에 꽃이 배시시 웃는다. 물을 머금은 듯 생기가 돋아있는 꽃의 얼굴을 살필 동안 내게 꽃을 주기 위해 포장을 하고 집으로 손수 찾아오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를 생각했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오래된 친구가 주는 편안함을 두른 친함의 범주 안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몇 번 안 본 사람처럼 마냥 어색한 사이도 아니었다. 모임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그녀와 나는 서로 알고 지낸 기간 동안 서로의 관점을 존중하는 지극히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집에 초대해 차 한잔 함께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아주 개인적인 감정과 고민, 가정사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서로의 커피 기호와 가족 구성원을 알고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는 사이이기도 했고,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나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왠지 모를 든든함을 은연중에 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혹여 그녀 또는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면 그 거리만큼 충분히 멀어질 수 그런 거리감이 서로에게 있었다. 즉, 날마다 얼굴을 봐야 하고 서로의 속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친하다 못해 서로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무심한 듯 지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받은 꽃 세 송이는 서서히 물에 번지는 연한 노란색 물감 한 방울처럼 나와 그녀 사에 놓인 이 관계를 산뜻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과하지도 부담을 주지도 않고 어떤 친숙하고 넉넉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마음씀에 감사함이 느껴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상대를 존중한다는 마음을 들게 하는 녀의 려가 멋졌다.


때때로 관심이란 감정을 무기로 삼아 상대의 감정을 으레 단정하고 뭉개면서, 친밀함 표방 속에 자신의 잇속을 꽉 채워 섣불리 아는 척 평가 내리는 사람들을 마주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배려심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친밀하게 다가와 나를 품평하며 내 감정을 휘두르려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마치 흰 옷에 뭍은 얼룩처럼 유쾌하지 않으면서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드는 묘한 불편함이다. 그러나 무심한 듯 보여도 잔잔한 울림을 주는 다정함에는 일상 속의 작은 위안과 기쁨, 그리고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사랑스러움이 담겨있다. 이러한 다정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다른 이에게 친절을 건네고 기꺼이 미소를 지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곤 한다. 온화한 마음으로 세상을 한층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선을 넘나드는 과한 관심 없이 바람이 통할만큼의 선선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가벼운 몸짓으로 다가온 다정함... 그녀가 오늘 내게 보여준 다정함은 꽃 세 송이에 담겨 이렇게 나의 하루를 조용히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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