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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Feb 14. 2023

추억은 거들 뿐

1월 영화일기

01/09 <더 퍼스트 슬램덩크>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구기 종목들과 대체로 담을 쌓고 산 인생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유일하게 시도하고 꽤 즐겼던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농구다. 친구들과 동네 인근 학교들 중 비교적 더 좋은 농구대가 있는 곳으로 부러 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슬램덩크>에서 자유롭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열의가 부족했던 걸까. 농구 경험이 신체적 성장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 키 작은 넘버원 가드 송태섭을 가장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에게 안 아픈 손가락의 캐릭터가 있겠냐마는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송태섭을 가장 아꼈던 모양이다. 무려 26년 만에 그의 서사로 시작해서 끝이 나는 극장판을 만들어버렸으니까. 송태섭의 아대 중 한 개가 생전 형(송준섭)의 땀이 밴 아대였다는 것을 밝히는 차분한 프롤로그를 지나면, 점점 짙어져 가는 스케치로 북산고 멤버들이 하나 둘 열기를 모으며 등장한다. 농구화와 농구공이 코트에서 내는 신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 심장 박동 수도 함께 오르는 듯한 경험을 했다. 원작에는 없던 송태섭의 삽화들을 배치하느라 다른 멤버들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했는데 이 점이 추억이나 정보가 적은 관객들에겐 다소 무심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구현했던 '앤'과 함께 빨강 머리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강백호는 조연으로 배치해도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캐릭터라 시종 눈길을 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오랜 시간 회자될 수 있도록 기능한 명장면-명대사들을 적재적소에 심어두는 섬세함까지 놓치지 않았다. 다 떠나서, 결과가 명백히 정해져 있던 경기임에도 시치미를 뚝 뗀 채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훌륭한 스포츠 영화다.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못한 에필로그를 보는 순간 "이제는 왼손이 아닌, 추억이 거들 뿐. <슬램덩크>의 영광의 시대는 바로 지금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01/19 <썸머 필름을 타고!>_시네마테크KOFA

굳이 따지자면 고교 시절 나의 아지트는 종로구 일대 극장들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나름의 공유까지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딱히 필요치 않았다. 방과 후 학원이나 PC방으로 가는 동급생들과는 달리 어느 순간부터 극장으로 갔다. 그저 극장이 좋았다. 얼마 간에 비용으로 어두운 곳에서 눈만 잘 뜨고 있으면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그 가뿐함에 반했다. <썸머 필름을 타고!>에는 그런 가뿐함이 주는 에너지를 감당 못해 직접 영화를 만들려는 오타쿠들이 나온다. 심지어 그들에겐 진짜 아지트가 있다. 아지트 소유주들의 명명한 봐도 심상치 않다. 맨발, 킥보드, 블루 하와이. 그들의 이름부터가 일본, 여름, 청춘이라는 삼박자와 완벽한 장단을 맞춘다. 그러한 장단에 시큰둥해지기는 어렵다. 타임머신이란 요소까지 더해져 영화의 미래에 대한 자못 진지한 태도까지 보여준다. 이 작품이 예측한 미래 영화의 기본 러닝타임은 5초.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에 관심을 둘 수 없을 만큼 각박해져서 영화계도 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 콘텐츠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추세의 지금과 결코 동떨어진 설정이 아니라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짜리 영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웅변하는 이 영화의 낙천성은 반짝반짝 빛난다. 영화의 막판 스퍼트가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원래 세상 모든 오타쿠들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고, 그렇게 세상은 반대편 냉소들과 함께 균형을 유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친애하는 영화인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와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오랜만에 <비카인드 리와인드>까지 떠올라 즐거움을 더했다. 이 작품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맨발(이토 마리카)은 듣던 대로 이경미 감독과 빼닮았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그 누구의 감상도 아닌 이경미 감독의 감상이 궁금하다.


01/19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_시네마테크KOFA

드디어! 학수고대했던 '블랙앤크롬' 버전을 보고야 말았다. 새해가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아마도 올 연말에 소소하게 잘한 짓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관람. 봉준호 감독이 지난 연말 '사이트앤사운드'에 등재한 '위대한 영화' 목록에 이 영화를 포함시켰고, "포스트 묵시록 영화에는 흑백 영화가 제격"이라는 조지 밀러 감독의 말마따나 센스 있는 KOFA가 상영을 해준 덕이다. 예상보다 격정적이었던 <썸머 필름을 타고!>와 연이어 봐서 피곤할 법도 한데,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앞으로도 이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쓰지 않고(주제에 쓸 수도 없고) 그럴 시간에 한 번 더 보겠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작품의 톤 앤 매너를 최대한 살린 듯한 김혜리 기자의 글('윙가르디움 퓨리오사!')을 한 번 더 읽겠다. 그것이 여러모로 이롭다.


01/20 <멋진 세계>_시네마테크KOFA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출소 직전까지 교도소장과 설왕설래를 하다 별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소장님과는 이런 얘기해 봤자 끝이 없어요." 이렇듯 <멋진 세계>는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 아닌가라는 인류의 난제 중 하나를 골라 끝없을 이야기를 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어쩌면 구태의연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단독 주연 배우의 연기력으로 밀어붙이려나 짐작했다. 그런데 극이 흐를수록 영화가 묻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갱생 가능성을 묻기 전에 갱생하려는 자에게 이 세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아닌가, 애써 갱생해서라도 살만한 세상인가를 먼저 따져보자는 이 영화의 제스처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야쿠쇼 코지의 열연은 손에 땀이 쏙 빠지게 했다. 미카미는 뜨거운 캐릭터인 만큼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카메라는 그가 울 때마다 강박적으로 멀리서, 주로 그의 뒷모습만을 응시한다. "안 찍을 거면 말리고 찍을 거면 말리지 말든가, 둘 중 하나는 제대로 해야지!"라는 극 중의 냉정한 대사처럼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미카미의 감정을 철저하게 바라볼 뿐 위로하는 법이 없다. 내가 연출했다면 그런 거리감이 유지됐을까. 야쿠쇼 코지의 얼굴(연기)을 조금이라도 더 담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간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영화들에 꾸준히 감응하긴 했었지만 이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차기작만큼이나 그의 신작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미카미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향을 맡으려 했던 코스모스의 꽃말이 궁금해져 검색을 해봤다. 애석하게도 질서, 조화, 평화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01/21 <유령>_메가박스 신촌

<암살>은 누가 봐도 최동훈 영화 특유의 말맛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밀정>은 누가 봐도 김지운 영화 특유의 무드가 묻어있는 작품이었다. 두 영화에 비해 덜 언급되고 왜 그런지도 알겠으나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모던 보이>는 정지우 영화 특유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재밌는 대사들도 많고, 미장센에서 느껴지는 무드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사랑) 때문에 계속 독립운동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항일 영화들을 골고루 닮았다. 나쁘게 말하면 그래서 애매모호하다. 현재로선 <유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담배와 관련된 인상적인 씬들이 많았다고 해서 비흡연자 관객인 내가 "맛있는 담배 향이 났던 작품이었다..."라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나오고, 점진적으로 커져가는 액션씬들도 볼만했고, 살아남았으면 했던 사람들이 살아남기까지 했는데, 이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유령>은 호텔에서 시작해 호텔에서 끝났어야 됐다. 감독의 전작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 학교에서 시작해 학교에서 끝났던 것처럼. 기대가 컸던 만큼의 실망을 안고서 어찌할지 모른 채 갖은 외전이나 상상해 본다. 난영(이솜)과 박차경(이하늬)과 유리코(박소담)의 삼각관계를 다룬 본격 액션 로맨스 영화를...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와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사쿠마 타다시(김중희)의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전우애를 다룬 (국적이나 시대를 바꾸는 게 좋겠다) 밀리터리 영화를... 천계장(서현우)과 고양이 하나짱의 동거 연대기를 다룬 영화 등등... 오타쿠는 이러고 논다...


01/25 <더 퍼스트 슬램덩크>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지난 9일, 90년대 말 SBS 방영 시절을 떠올리며 더빙판 관람을 했었다. '우리말녹음'의 외국 영화 관람은 그때 그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이대로 자막판(오리지널)을 보지 않고서 보내기가 못내 아쉬워졌다. 오산이라면 오산이었다.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비용이 따르는 '다시보기'는 사치에 가까우니까. 게다가 영화관 컨디션은 발전도 없이 요금만 거의 갑절로 뛴 상태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모른 척 그냥 보내버리는 게 맞는데 누가 추억엔 아무런 힘이 없다고 했나. 그놈의 추억이 끝내 사치를 부리게 했다. 대체불가한 작명 센스로 아마도 영원히 회자될 (당시) 장정숙 편집자는 자막판에도 선수들의 이름이 친숙한 이름으로 띄어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뿌듯했을까. 이러나저러나 두 번째 관람도 즐겁기만 했다. 다시 봐도 끝내주는 스포츠 영화다. 앞으로 제작될 농구 영화들은 그것이 실사여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멀지 않은 시기에 공개될 것 같은 <리바운드>의 장항준 감독은 지금쯤 부담감에 울고 있을까, 기대감에 웃고 있을까. 이제는 유명한 작가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유명인 걱정은 그만하고 코인노래방이나 가자. 첫 곡은 당연히 박상민의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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