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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Mar 20. 2023

견디기

2월 영화일기

02/12 <애프터썬>_메가박스 신촌

오랜만에 친구와 영화를 봤다. 관람 전 우린 서로의 부모, 특히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통화 톤이 요즘 부쩍 다정해졌다고 말했다. 친구는 약주에 적당히 취한 아버지로부터 매번 전화가 오는 게 귀찮으면서도 좋다고 말했다. 관람 후 집으로 가는 길, 친구네 아버지로부터 마침 전화가 왔고 친구 사이같이 통화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짧게 통화를 끝낸 친구에게 소피(프랭키 코리오)랑 캘럼(폴 메스칼) 같았어!...라고 되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아빠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소피는 현재 아빠 캘럼과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소피에게 아빠란 과거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휴양지에서 찍은 동영상 속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당시 아빠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은 소피는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끼어드는 아빠와의 기억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악할 수 없는 당시 아빠의 언행들은 곱씹을수록 미궁이다. <애프터썬>은 이토록 추상적인 소피의 괴로움을 캡처하고 싶을 만큼의 미장센과 당장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은 음악들로 팬시하게 보일 만큼 스크린에 수놓는다. 죽음으로 직결될만한 캘럼의 행동들 마저 한 폭의 그림 같다. 슬픈 그림 같은 연기를 하는 폴 메스칼을 보면서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참 징그러웠다. 현재 끔찍한 재난으로 아수라장이 된 뉴스 속 튀르키예는 잊고서 이 영화가 휴양지로서 담아낸 튀르키예 풍경에 반했을 때는 내가 참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징그럽고 죄스러울 수 있는 관객이어서 감사했다. 아직까지는 내가 쥐면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상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소피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관객이었다면 지금처럼 이 영화를 탐미할 수 있었을까. 옆좌석 친구에게 캘럼의 행방에 대한 되지도 않는 추리나 늘어놓고 앉아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영화에서 누구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관객이었다. 이토록 운이 좋은 관객이었다는 걸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02/17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_넷플릭스

천우희가 나온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았다. 분명 예고편만 보려고 했을 뿐인데 본편까지 재생이 되었고(넷플릭스에서 하릴없이 유영하다 보면 이럴 때가 종종 있고 그럴 때마다 '뒤로 가기'를 잘도 눌러왔는데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프닝, 즉 스마트폰이 소지자의 기상과 함께 하루를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몽타주에 매료되어 그대로 멱살이 잡힌 채 두 시간이란 시간을 죽여버렸다. 천우희가 분실된 스마트폰으로 인해 지옥을 경험하는 얼굴을 화면 가득 표현했다면 임시완은 그 지옥의 설계자로서 심드렁한 얼굴로 맡은 바 임무를 소름 끼치도록 행한다. 요즘 많이 쓰이는 듯한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말에 지나칠 만큼 적합한 눈을 가진 배우다. 세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희원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캐릭터 자체의 개연성이 부족한 나머지 이 영화의 단점으로 꼽을만하다. 얼리어답터는 꿈도 못 꾸는 레이트 오브 레이트어답터인지라 보유한 스마트 기기들도 별로 없고, 현재 쓰고 있는 아이폰도 구식인 데다가 보통의 SNS 앱 하나 깔려 있지 않아서 만약 내 전화기를 극 중 임시완이 주웠다면 되려 심심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느냐며 그대로 전화기를 던져버리지 않았을까, 맥 빠지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없는 내 방을 괜히 한 번 둘러봤다... 노트북 카메라에 오래 붙어있던 마스킹 테이프를 이참에 교체했다.


02/20 <다음 소희>_라이카시네마

소희(김시은)의 영혼이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예상보다 지난한 일이었다. 영화가 끝났을 땐 흡사 근육통까지 찾아왔다. 자각할 새도 없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었던 탓이다. 요약본이긴 했지만 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것이 알고 싶다> 1068회를 미리 찾아봤었고 배두나 배우가 각종 매체에서 홍보하는 과정까지 거의 다 본 상태였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고 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매정하게 느껴질 만큼 반으로 툭 자른 영화의 왼편에는 소희가, 오른편엔 유진(배두나)이 서 있었다. 한겨울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던 소희의 냉기 어린 발자취를 탐정처럼 따라가는 유진의 발걸음은 갈수록 뜨거워지지만 그만큼 무력하고 비통했다. 김시은 배우는 생기 가득한 얼굴부터 텅 빈 얼굴까지 가뿐하게 오가며 영화의 전반부를 안정감 있게 이끌고, 배두나는 <도희야>의 영남에 이어 오유진 형사도 "배두나여야만 했다"던 정주리 감독의 말에 슈퍼히어로도 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무게감을 더하며 후반부를 책임진다. 아주 작은 상영관에서 봤다 보니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동료 관객들의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를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부검실 안, 유진이 자신의 이름을 두 번째 쓰게 되는 장면에서 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섰을 때,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의 문장들이 바람처럼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에는 두 종료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다음 소희>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애썼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이 작품을 보며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릴 수많은 관객들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을 견뎌야 할 이유를 한 번 더 찾는다.


02/24 <소설가의 영화>_KOFA시네마테크 

<그 후>의 택시 장면을 좋아한다. 잊을 수가 없다. 그 씬은 홍상수 감독의 사적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어 따져보면 없어도 그만인데 막상 없다면 눈이 오지 않는 겨울처럼 허전할 것 같은, 가히 영화 속 영화 밖 명장면이랄까. 써놓고 보니 말장난 같은데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된다. 그 장면에서 김민희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극 중 이름까지 '아름'이었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은 다시 보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산이었다. <소설가의 영화> 속 영화에서는 감독 본인의 목소리까지 직접 덧대 김민희를 묘사한다. <그 후>의 택시 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김민희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 명장면이다. 길수(김민희)가 등장하기 전 <소설가의 영화>는 엄연히 준희(이혜영)의 영화였다.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준희마저 길수가 등장하자마자 압도당한다. 이제 홍상수 영화에서 김민희를 이길 수 있는 배우는 없다. "날은 아직 밝지만 날은 곳 저문다. 날이 아주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주문 같은 대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옥희의 영화>에서 이선균이 집 앞에서 읊었던 주문에 비하면 구체적이고 산뜻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겠다. 그래서 하남에 있다는 타워도 가고 싶고 분식집도 가고 싶고 책방에도 가고 싶다. 길수와 준희가 처음 만났던 산책길도 거닐고 싶다. 개봉 당시 라이카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옥상이 항상 개방되어 있는 건가. 다음 방문 때 문의해 봐야겠다.


02/25 <오마주>_KOFA시네마테크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영화의 토대인 만큼 매 씬의 결이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이정은 배우의 솔직 담백한 연기를 중심으로 모든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에 알맞게 가지를 친다. "돈 되고 의미 없는 일"을 찾을 만큼 경제적인 궁핍을 느꼈던 영화감독이 필름 복원 작업을 통해 다시금 영화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여정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너는 언젠가 지워질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이란 선배 감독이 남긴 문장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여성 영화인들의 고군분투는 뭉클할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지만 늦게라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어서 '정말'이라는 부사를 남발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신수원 식 '시네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이다. 영화가 끝나고 무대로 등장하는 신수원 감독을 보는데 극 중 이정은 배우가 그대로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스텝들이 본인과 무관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감독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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