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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Apr 18. 2023

꽃다발을 읽는 시간

<그림과 그림자>를 읽고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씨네 21에서 연재됐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장기 연재에서 장기 휴재라는 긴 잠에 들었을 뿐 언젠가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기다린 애독자들에게 굿모닝 인사를 건네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김혜리 기자의 가장 근간인 <묘사하는 마음>의 서문은 그런 내게 비보에 가까웠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이전에 쓴 글도 더러 있다. 기사를 퇴고해 묶는 책으로는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함께 담고 싶었다." 그가 차분하게 전한 예감에 마음이 조급해져 도서관과 중고서점들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겨 다녀야만 했다. '영화의 일기'들로 묶어진 첫 번째 책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그가 잡지와 단행본을 오가며 쌓았던 문장들까지 실물로 읽고 싶어서였다.

그중 도서관에서 만난 <그림과 그림자>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예술서적을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동네서점에 연락해 절판이 안 됐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예약구매로까지 이어졌다. 2011년 10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조용한 생명력으로 8쇄를 찍어낸 이 아름다운 도서는 겉모습만으로도 책장에 꽂아두고 싶을 만큼 탐나는 책이지만, 김혜리의 큐레이팅이 아니었다면 쉬이 접하지 못했을 것 같은 그림들이 고요하게 숨 쉬고 있으며 그들을 바라본 김혜리만의 밀도 있는 속내 역시 독자를 재촉하는 법 없이 끝까지 시선을 붙잡는다.

<그림과 그림자>는 김혜리의 다채로운 '글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가웠다. 에밀 이자르의 <그로 칼랭>이라는 소설과 도르예 커스텐 신노의 <봄날의 쾌활한 밤>이라는 수묵화에게 바친 꼭지는 그간 저자의 서간체를 좋아했던 (나와 같은) 독자라면 단연 주목할 만한 챕터다.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라는 미완성 그림에 대한 묘사는 심지어 콩트로 시작한다. 그의 문학성을 짧지만 두텁게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에 대한 글의 도입부는 (이 책의 시점으로부터) 십여 년 뒤에 도착한 <묘사하는 마음>의 서문에 있어도 어울릴만한 인트로다. '묘사'에 대한 김혜리 기자의 한결같은 성정을 확인한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그의 글과 말에 매혹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애를 먹어왔던 나는, 김혜리의 글과 말이 " '보기'와 '쳐다보기' 사이의 계곡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보여서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그가 피워낸 꽃들로 정갈하게 꾸려진 책을 선물하거나 받는 것은 실제 꽃다발을 주고받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여담으로, 언젠가 김혜리 기자가 그동안 자신과 부대껴 살았던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마리 풀 듯 풀어주기를 바란다. '수지'에게, '타티'에게, 그리고 '아로하'에게 항상 자신의 저서를 바쳤던 저자가 그들(?)과 산책하며 만난 들꽃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줘도 몸을 기울여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침 <그림과 그림자>도 개가 주연인 두 그림에 대한 애틋한 묘사를 발판 삼아 에필로그를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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