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밥 짓는 사람 Mar 30. 2022

홍어 - 어쩌면 옴니버스

다락방 

나는 짚풀 냄새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분명히 이 냄새는 말이지. 여름 동네 산 위로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 농가에 있던 폐 축사. 거기 구유통에서 나는 냄새였어. 풀이 다 자랐으니 녹색 냄새 때문에 후끈하면서도 쓴 냄새가 맞아. 거의 이 계절이면 쑥이 독해지는 즈음이니까. 대충 오월 말 그 정도? 먹이통 안에서 나는 냄새는 할아버지 방에서 나는 그 냄새하고 비슷해. 신문지도 몇 겹을 발라서 누렇게 삭아가고 , 방구석에 놔둔 요강은 차마 열어볼 수 없는 방. 말리고 말려도 깔려있는 이불은 늘 눅눅해. 신기하게도 그 밑으로 발을 뻗으면 심하게 뜨신 기운이 달려드는데 , 데이지는 않아. 그때 그 냄새야. 할아버지가 좋아서 기억하는 냄새가 아니고, 그 나이가 대충 예닐곱이니까. 어디 보자 , 이 정도 기억은 다들 있는 거 아닌가?


그 방에서 밥을 먹어. 모서리에 앉으면 재수가 없다는 말을 그때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내 인생은 별 볼 일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게 바로 그 집에서야. 신당동 집.  다행히 도망칠 곳이 한 곳 있었는데, 안방에 있던 다락방. 다락방도 방의 격이 있을 것이고, 사소하게라도 용도가 있어. 대부분의 집은 말이지. 그러나 이 집은 좀 달랐어. 다락방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각종 고물을 쌓아두는 것이지. 그런데 다행히도 이 집에서 책은 고물에 속했나 봐. 몇 칸 안 되는 방에는 책을 놓을 생각을 안 하고 전부 다락방에 처박아놨어. 다락방에는 몇 촉 다마 인지 기억은 가물가물 한데, 아무튼 다마가 하나 있었고. 다락방으로 도망친 나는 밥시간이 되어 찾지 않는 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책들을 읽는 게 유일한 시간 보내기였어. 그때 그 냄새가 바로 이 냄새야. 먼지가 동글동글하게 굴러다니면서 자기보다 작은 먼지들을 몸에 흡수하다가 잘못 만난 고양이한테 밟히면 팡하고 터질 때 나는 냄새.


종로 순라길. 1층은 자리가 좁고, 2층에 올라가면 살짝 몸이 갸우뚱 하긴 한데, 아늑한 방에서 주문을 할 수 있는 집이야. 일단 이 집은 김치가 훌륭해. 저렇게 오랜 시간 묵혔는데, 문드러지지 않네. 사실 묵은지가 저렇게도 많은 양념을 치대고 있으면 김치 섬유질이 전부 뭉그러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잘도 살아있어. 다락방에서 좋은 책 발견한 기분이야. 그리고 동동주. 다락방 벽지 색깔이 대부분 누리끼리하거든. 그런데 그중에서도 밖에서 새는 비가 벽을 타고 들어올 때는 좋은 벽지에서는 커피 향도 좀 나고 얼룩도 리하스식 해안 그려놓은 것처럼 , 아니면 켜켜이 겹쳐 잘라놓은 케이크처럼 아름다운데. 싸구려 벽지를 쓴 신당동 그 집은 벽지도 냄새가 구렸어. 먼지 냄새는 기본이고 , 빗물이 새어 들어오는 틈으로 고양이가 오줌을 쌌는지 암튼 묘한 기분의 냄 사가 같이 묶여 내려와. 그때 그 몇 촉의 다마와 벽지 사이에 울렁거리는 색이 있어. 노란색인데 좀 밝아. 

여기 동동주가 그래. 색은 죽지 않은 병아리 색이야. 생기 없는. 그런데 향이 좋아. 김치 향도 이기고 , 잠시 후에 올라올 홍어 향도 이기고.


홍어가 올라왔어. 지하실 같은 다락방. 아니 그 동네 전체에서 맡을 수 있었던 그 습하고 꿉꿉한 냄새. 그 먼지가 터지는 듯한 냄새. 홍어 냄새야. 몇 점의 돼지고기 기름이 먼지 냄새를 위로하려고 애를 쓰는데, 먼지 냄새는 거두어 가지 못해. 적적한 방안에 홍어가 들어오니까 이야기도 밀어내고, 공간도 조금 더 확장되는 기분이야.

냄새가 그래. 눈은 오래 보고 있으면 크기가 줄어든다며? 맛은 익숙해지면 달지도 맵지도 않고 그냥 무거운 맛 하나로 수렴되고. 그런데 냄새는 눈을 감고 있으면 ,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 소자들 중 가장 큰 방에서 기억을 꺼내온다고 하더라고.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는 확실해. 홍어에서 나는 먼지 냄새에 내가 위로받고 있다는 것. 나는 그 다락방에서 무사히 살아 나왔고, 오늘 여기 순라길에서 모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어.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서 그 공포 속에서 겨우 부여잡은 게 세로로 쓰여있던 일본 소설이며, 조선시대 춘화집이며, 신문이었는지 말이야. 발끝에 있던 잉크통을 억지로 열었는데, 잉크도 싸구려는 홍어 냄새가 났다 라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서 현장 복기하고 있잖아.


순라집 홍어를 만났어. 홍어가 내 집에서 나간 적이 없고, 내가 홍어에게 쫓겨난 적은 있는 것 같아.

아니 먼지 이야기야. 책 사이에 있던 먼지 이야기. 몇 점 먹지도 않았는데. 그 다락방 책들이 보이는 것 같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