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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Nov 22. 2023

뭉근 탑돌이

제주도 독립서점 방문기

고백하건대 , 나의 독서 기록의 대부분은 중학교 정도에서 완숙기를 거쳐 고등학교에서 말소되었다.

좀 더 예각화한다면 , 기록 중 문학 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도 아마 사춘기로 추정되는 그즈음. 그때쯤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분량의 무협지도 있을 것이고, 춘화가 들어있지 않은 성인물도 꽤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독서의 대부분은 그때쯤 마무리되었고 취미란에 '독서'라고 기재하는 것도 그때쯤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대학 입학 후 1학년 때까지는 서점 가는 취미를 버리지 않았다. 학교 앞에서 버스 한 번이면 종로까지 이어져 있었고, 동대문 운동장 옆 청계 고가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던 중고서점이 소소한 산책길이며 데이트 코스가 되어 주었다. 물론 시대는 책을 배려하지 않았고, 동네는 사그라들었으며, 서점은 늦은 겨울 동네 골목 눈처럼 그늘에 남아있다가 녹아 사라졌다. 서점을 찾는 것은 특수한 기호되었으며 , 영풍문고와 교보문고를 제외하고는 서점의 모양새로 남은 곳이 없었다.  사회 서적이라 불리는 책들을 취급하던 곳은 지명수배 스토리까지 얹어서 파는 음악다방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취미 선택에 갈급함이 없는 시대 아닌가. 서점과 나는 점점 멀어졌고, 알라딘 예스 24 덕분에 서점 갈 일은 더더욱 없어졌다. 머 나도 문제다. 책은 서점에서 보고 구매는 알라딘에서 하고 앉아있으니 서점에 앉아있는 주인이 보기에는 영양가 하나 없는 손님이 앉지도 않고 공기만 흩트려놓고 가는 꼴 아닌가. 공기만 축내고 말이다.

속초 문우당 서림. 문 여는 시간 오전




지방에 놀러 가서 식당 커피 시장 박물관 이 순서로 구경을 한다. 익스트림과 거리가 먼 삶인지라 물에 발 한번 담가본 적 없으니 , 경치 좋은 관광지라 해도 저 순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강릉이었던가. 식당 커피 식당 커피를 반복하다 보니 카페인 하루 허용치를 넘었다. 밥을 넣을 공간도 부족했다. 아직 서울로 돌아갈 시간은 아닌 것 같아서 찾아본 곳들이 서점이었다. 게다가 서점이면 관광객들이 눈퉁이 맞을 확률도 낮은 엔틱 한 물건들도 많이 있지 않은가. 강릉 속초 지역은 다행히도 중간 사이즈(?) 중견 기업의 면모를 갖춘 서점들이 있었다. 고래 서점. 문우당 서점 이 기억에 남는다. 보유하고 있는 책도 베스트셀러 급이면 그때그때 아쉽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 서울 서점에서 결국 찾지 못했던 김광석 기타 악보집을 문우당 서점에서 찾았을 때의 기쁨도 있었다. 이정선 기타 교실도 같이 있던 서가에서 말이다.  군산에서 찾은 작은 서점은 서점의 기능보다는 엔틱 소품과 바이닐이라고 부르는 엘피판, 그리고 동네를 그린 엽서들도 있었다. 춘천 시청 옆 서점에서는 서울에서는 읽지 않았을 것 같은 남의 이야기, 에세이 집들을 마구 집어 산 적도 있고 말이다.

동네 아파트 들은 서로 비슷해져 가는데, 오히려 서점들은 가난한 외모지만 뾰족뾰족하게 다들 솟아나고 있으니 그것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만춘서점. 비 오는 날. 함덕 해수욕장 뒷길


제주에서 처음 찾은 독립서점, 만춘서점이다. 와이프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네비를 잘못 찍었는데 , 그 건물이 만춘서점이었다. 함덕 해수욕장 화려한 해변가 뒷길. 예전 함덕을 기억하는 토속 외지인(그러니까 경력이 좀 되는 관광객) 들이 선호하는 길. 소소한 시골길 한 자락에 만춘서점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 고만고만한 그 서점들에 늘 있는 책들 사이로 제주 올레길을 그린 지도도 보였고, 요만 요만한 서점 스테디셀러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 에세이"순간을 믿어요"가 책장에 올려져 있는 서점. 그렇게도 이쁜 제주풍경을 그렇게도 큐트 하게 그려낸 엽서를 몇 장 들고, 저쪽 위에 보니 재즈 역사책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구경하고 , 그러다 보니 헛헛한 마음을 직선으로만 그려낸 일본 작가의 "머 대충 먹어도 잘살아(제목이 대충 이런 것이었는데)" 같은 책도 사게 되고, 함덕 해수욕장 뒤편 시골길에서 잔잔한 도시 이야기를 골라 카운터에 올리니 이런 젠장 "50000원"이 넘게 결제되는 상황. 결제 후 나가려는데 주인장이 손에 쥐어준 올레길 도장받는 제주지도 한 장. 제주 관광지도로 써야 하나라고 받아보니 '제주 독립 서점 투어' 스탬프 받는 지도였다. 


서점이 얼마나 많길래 투어까지 할 정도 인가 하고 펼쳐보니 , 관광지도 맹키로 제주도를 돌고 돌아 채울 수 있는 분량이다.  물론 이 미션을 행할 의지와 체력은 없었으나 , 다음번 제주 방문 시 , 흑돼지 맛집보다 서점을 한 곳 더 찾을 수 있다는 것에 기분 살짝 좋아졌다.


그 뒤로 제주가 나를 , 혹은 내가 제주를 소원하게 대하다가 이번 예비 3명 여행에서 큰 일정 사이사이에 서점을 검색해서 다행히 문 닫기 전 서점을 다녀왔다.

독립책방이라는 이름이 강하다. 옆에는 앤티크 문구 파는 곳도 있다. 덮어놓고 사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후북스는 공항과 숙소 근처였다. 하루종일 만삭화보 촬영으로 지친 와이프가 그래도 배려를 해서 서점을 검색해 줬다. 책 구경하는 취미를 존중해 주는 것. 배려받았다.  좋은 곳. 좋은 위치에 있는 독립서점이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이름에 어울리는 동네에 그럭저럭 배치 잘된 가게.   베스트셀러에 이름 자주 올리는 여성작가의 독립출판물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독립출판물이 작가별로 잘 구성된) 잘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아주 반대편 책장에서 국어의 올바름에 대한 책을 집었다. 이 서점에서 내가 친하게 집을 수 있는 책은 이 책뿐이다.  독립서점의 특성 중 "제주 독립 서점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사실 나는 독립 서점이라는 것의 정의를 확인해 본 적이 없다. 인디레이블은 많이 접해봤는데 , 서점에서 독립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 물론 검색해 보면 많은 이들이 규정해 놓은 답이 나오겠지만 요즘 정의라는 것은 금세 상쇄되는 내용들이 많다 보니 각자의 정의에 맞게 해체하고 조립하면 될 일이라는 생각이다.  내 정의에서는 인디펜던트  쪽보다는 시대 이론에서의 독립을 자주 주창하는 출판물.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이론에 대한 집중은 당연한 것. 동의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사회에서 희석될 수 있는가. 농도를 높이는 가. 는 이런 서점에서부터 많은 노력을 서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국어. 수동태 피동태  그것뿐 아니라 어휘력은 글 쓰는 이에게 필수불가결한 능력치다.


그다음 날 역시 하루를 모두 모다 쓰다가 찾은 곳. 영화 "건축학 개론"으로 제주의 정동진이 되어버린 (그러나 그만 큰 오염되지는 않은) 위미항 포구 초입에 있는 라바 서점. 문 닫기 전 슬쩍 들어간 곳이라 구경을 착실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후다닥 책을 고른 곳. 아주 필요한 책을 찾았다. 역시 이런 책은 검색으로는 못 찾는다. 서점에서 책을 들고 놓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드롭되지 않는 책. 서점에서 가능하다.


문학비평. 장정일의 맛깔난 험담.

문학비평 에세이(?)를 찾아보지는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평만 모다 놓은 책은 잘 안 볼 것이다.

이 책은 서간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제주를 재료로 한 에세이 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 재료는 문학.

요리책 같다. 물론 이 책 집기 전에 자영업자의 식당 정착기를 동시에 읽어서 그 느낌대로 해체한 부분도 있는데 , 장정일은 역시 이렇게 무규칙 이종격투기를 잘한다.라는 느낌.  책을 더 읽게 만드는 애피타이저 같은 책이다. 건전한 유튜브. 말끔한 틱톡. 머 그런 느낌? 

라바 서점에서 조카에게 줄 세계지도도 샀다. 원래는 세계 지도책에 각 명소 안내가 나오는 책을 집었는데, 앞부분에 살짝 파손이 있어서 아이에게 줄 때 점수 깎일까 봐 지도로 바꿨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책을 권하고..... 아이 귀에서 피가 나겠지? 

와이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성본능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감싼다.

"아빠에게 접근하지 마라. 저 사람 말이 너무 많다." 

나의 배움의 짧음을 대신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책이니,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보여주고 싶은 거. 

그것까지 콤플렉스 작동으로 보면 슬프다. 아이에게 우주를 채울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다 부족하지.


이 날 저녁, 사실 고깃집 한 곳을 가고 싶어서 (중간에 시간이 남아 ) 애월읍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서점을 찾아 검색했다. 결론은 서점투어는 성공. 고깃집은 실패. (다행이다. 고기의 눅진한 향보다 책으로 얻은 게 더 크다)

숨 쉬는 오늘. 우리는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애월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나눈 글을 쓰는 이야기. 그것에 대한 해법을 모두 이 책에서 찾았다.

늦은 시간에 방문해서 전화드렸더니 서점 위에 집에서 선뜻 나와주셨다.

사실 큰 개가 문 앞에 있어서 못 들어가고 있었다. 무서워서. 하지만 큰 개는 매우 순했고, 손님 친화적이었다.

걱정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 같은.  이 서점은 네이버 안내에서는 그림책 전문이라고 되어 있었다.

와이프가 조카들 책을 더 사겠다고 해서 들린 곳. 나도 그림책을 집어 내용을 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집었고, 책을 열고 딱 반 페이지 읽고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다.

사람은 꿈을 꾸고 사는 것. 현실과 배치될 것. 나는 필히 무능력할 것. 글은 무엇을 위해 쓰는가. 가치 있는 글은 무엇인가. 부끄러움은 어떻게 해소하는가.  이런 잡다하고 돈 안 되는 잡념의 해소를 위해 쓰인 책.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자이오사무는 이미 지워진 생이고 글만 남아서 왜곡하기도 좋지 않은가.


그림책도 하나 샀다. 그 책은 와이프가 내 여동생에게 "엄마의 딸이며 누군가의 엄마"라는 것. 그것에 대한 위로를 전하는 느낌으로 산다고 했다.  


각 서점에서 보낸 시간은 대략 20여분.  한가한 시간에 방문해서 무언가를 꼭 사야겠다는 압박은 없었고, 

"제주 독립서점"에서만 파는 책이 꼭 있기를 바란 관광객의 마음은 있었다.  위미항에서는 핫초코를 마시고 충분히 당도 충분한 뇌 상태로 책을 골랐고, 이후북스에서는 페미니즘 작가들의 책 사이에서 건조한 문장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의도적으로 찾는 시간이었고, 그림책 파는 숨 쉬는 오늘에서는 "올해 나를 위로한 단 한 권의 책"을 찾아낸 기특한 시간이었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둥그렇게 작은 오름처럼 툭 툭 솟아있는 지도 표식 따라서 서점을 찾았다. 가는 길 동안 도시처럼 빠른 화면전개가 없고, 한라산 줄기처럼 텅텅 한 산길도, 가끔은 바닷길도  낡은 구 도심도 지났다. 서점 가는 길 까지가 더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서점에서는 그 여행에 대한 표식으로 아주 좋은 책들을 샀다. 그날 산 책으로 서울에서 크게 탑돌이 하는 것처럼 돌 수 있겠다.

한라산이 아주 큰 뭉근한 탑처럼 서있는 제주에서 책을 사 왔다. 시간을 얻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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