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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Sep 21. 2024

푼돈을 법니다.

그들처럼 말입니다.

푼돈을 번다는 말을 검색창에 넣어보면 , 1. 많지 않은 돈 , 2. 적은 액수로 나뉜 돈.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겨우 푼돈..." " 푼돈 벌어서 어디다 쓰려고"라고 말을 합니다.


아버지. 그 사람은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 대경상고 2학년 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상황을 도저히 감당키 어려워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왕십리 카센터에서 차 고치는 일을 배웁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이 가난했고 가장이 되는 시절이었으니 생산계급 벨트에서 그렇게 낯선 계급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배워주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생채기가 났을지는 모르나 , 돈을 벌기로 작정한 아이에게는 몇 푼의 돈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모른다. 집에 돈이 없어서 못 가르친 게 너무나"

제가 공부를 등한시하거나 , 반대로 어쩌다 운 좋게 학급에서 순위권에 오르면 듣던 말입니다. 지금 돌아보니 극한의 지점에서 자극을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쓴 말이군요. "너희 아버지는 사실..."

영웅과 싸울 생각은 없었으니 , 아버지의 무용담은 대부분 걸러내기로 합니다. 싸움도 잘했다고 하고, 얼굴도 잘생겼다고 하는데 , 도저히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 기억에서만 주워 모아 보기로 합니다.


택시. 처음에는 초록색 포니 1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택시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부분은 전적으로 증언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76년부터 택시를 했다고 하니  당시에는 프런티어 직업군이었습니다. 여러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개인택시를 사서 몰고 다닙니다. 그때 택시에는 메타기가 동그란 빨간색 대가리가 달려있었어요. 그래서 택시를 타게 되면 그 동그란 대가리를 90도 옆으로 꺾습니다.

택시는 하루종일 달려요. 서 있으면 수다나 떨고 , 담배나 피고, 차 세우고 술이나 마시게 되니 , 달리고 있는 택시가 '살아있는 가장 이오. 노동자요. 사장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고기 한근이라고 끊어가려면 달려야 합니다.' 메타기 꺾이는 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 '끄르륵' 하는 소리였습니다. 택시를 우마차 보다 위급, 인력거보다 신식이라고 치더라도 고삐를 당기는 소리는 비슷한 거 같군요. 끄르륵.

좀 시간이 지나 동전 지갑이 동전 케이스로 차량 한구석에 달리게 되던 그 시절. 메타기가 전자식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숫자가 움직이면서 돈이 올라가는 방식. 그러니 우리는 택시에 타서 뒷자리에서 앞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빼꼼 쳐다보게 됩니다. 얼마어치 갈 수 있는지 계산도 해보고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요. 어릴 때 친구들 세 명 정도 모아서 제가 인솔해서 남산 한 바퀴 택시 타고 돌고 그랬어요. "아저씨 오백 원어치 태워주세요"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말이 달리는 메타기가 빠르게 뛰면 돈이 들어옵니다. 한 번에 큰돈이 벌리는 경우는 없어요. 하루종일 말이 뛰어서 백 원 이백 원을 쌓고 쌓으면 그게 하루에 큰돈이 되어 들어옵니다. 아버지도 사람인지라 가끔 일탈을 해서 내기 당구도 치고 술도 마시고는 했지만 , 앵간해서는 집에 쌀이, 분유가 떨어지지 않도록 돈을 가져다줬습니다. 어머니가 말하는 '아버지가 돈을 가져다 탕진했다"의 대부분은 그 미친 노동운동 하시겠다고 집에 돈을 퍼다가 쓰신 거니까 그건 전 용서하기로 합니다. 학용품도 , 스케이트도, 축구공도, 한 번도 거르고 안 사준 적이 없으니 저에게는 성실한 아버지로 남기기로 합니다.


어머니. 그녀는 1967년 인가 암튼 그즈음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사촌 오빠가 영등포에 큰 공장에 있었다. 오빠에게 부탁해서 여공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통상이라는 이름의 회사다. 전 세계로 가발을 수출하는 회사. 당시 한국은 가발 수출국으로 이름이 높았다. 여공들이 백 등 아래에서 허리 한번 안 펴고 남의 머리를 손에 들고 촘촘한 그물에 굽어진 코바늘을 들고 한 올 한 올 머리를 심었다. 가발이 남에게 나를 가리는 것 중 가장 정성이 갸륵한 물건임에는 분명하다. 인모가 아닌 천연모로 심으려면 천연의 머리를 구해와야 하고 그것을 죽지 않게 끝처리를 잘해서 옆으로 코다리 묶듯이 몇백 모씩 묶어낸다. 그리고 그 고무줄 몇 뭉치를 며칠이나 죽어날 정도로 꿰고 꿰어 만드는 게 가발이다. 여공 아니면 못 할 일이다. 하늘색 초크로 머리 면적을 나눈다. 한 번에 안되니까 정수리 빼고 나머지부터 꿴다. 고기 먹을 때 맛있는 부위 내버려 두고 뼈 부분부터 핥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나중에 좀 수월해질까 해서 말이다. 아차차. 눈이 너무 무거워 초크로 그어놓은 줄이 잘못되었다. 가르마가 틀어진 것이다. 밑의 판을 뜯어낼 수 없다. 개발부에서 생 지랄을 할 것이니 머리를 살살 꼬집어 빼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쉬운 부분부터 하는 것인데. 이런 일의 반복이다.  어머니는 중학교까지만 배워줬다.

나는 여전히 입에 익지 않는데 어른들은 꼭 "배워줬다 "라고 하신다. 본인이 배운 것이 아니라. 물론 배움 자체가 하나의 특혜였으니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앞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을 수도.

암튼 중학교까지 배운 냥반은 여공 생활 중 남편 될 사람을 만났다. 서울통상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다가 식모살이, 공장 등을 전전했지만 살림이 잘 펴지 않았다.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남편의 벌이는 반푼이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선하게 남에게 사기 안치고 사는 게 어디 쉬운가.

어머니는 석관동에서 다시 가발 공장에 다녔다. 오전에 가서 오후에 오면 하루 벌이가 동태찌개 정도는 상에 올릴 수 있는 벌이였다. 물론 내 시선에서였다. 동태찌개뿐이겠는가. 우리는 두해 살이 후 도로 옆 문간방에서 대문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갔다. 동태찌개를 잘 참아낸 내 덕분이다.


어머니는 집에서 가발을 밤마다 만졌다. 실력이 워낙 좋으니 남들 15일 걸릴 가발을 일주일 이면 혼자 떠냈다. 가발 한올 심으면 당시 10원이 안된 것으로 기억한다. 아닌가? 머리 한올인가? 암튼 그 큰 가발 하나 완성하면 내 아동 세계 전집을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줌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아 형광등 스탠드 앞에서 라디오 작게 틀어놓은 어머니 등을 보다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는 방석에 누워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몇천 올을 몇천 개의 가발에 심고 심어 중학교 때 치킨집을 얻었다. 남의 털 심는 것 끝나니 닭다리 배를 가르고 있네. 암튼 쉬지 않고 무엇을 째고 빼고 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말이 달리는 그림으로 백 원씩 푼돈을 벌어왔다. 어머니라는 분도 십원도 안 되는 머리 한올씩 심어 맨바닥 같은 곳에서 지금을 살았다. 푼돈을 벌었다.라는 말이 나는 이분들의 노동에 가장 어울리는 아름다운 말 같다. 바람이 세하게 부는 곳에서 소금을 얻으려 해도 소금물을 떠 와야 하는데 , 세상 어디에 푼돈 아닌 게 있단 말인가.


나는 서울통상 노동자의 아이로 , 삼정운수 택시 노동자의 아들로  그 푼돈으로 살고

노동자가 되어 진하게 살았다.


지금은 나보다 귀한 아들에게 사소한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잘은 못하지만 푼돈을 벌고 있다.


아침마다 아직 말귀는커녕 내 얼굴 못 알아보는 아이에게 웃으며 말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내려온다

"아들 아빠 푼돈 벌어올게 "


나는 아직 변변한 푼돈 스토리도 쓰지 못하고 있어서 좀 미안하다.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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