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음악 총재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새로운 교육법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이 손 모양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알면 댓글로 공감과 어그로를 끌어주세요!) 괜찮다. 나도 코다이에 대해서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으니까. '저거 뭐, 수어 내지는 수신호 아니겠어.'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마 우리는 이전에 이 그림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가듯 배웠을 확률이 높다. 왜냐면 이것은 서양의 ‘7 음계’를 손으로 설명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성장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유아기 아이들을 위해 고안된 어린이용 음악 지침서이다. 우리는 이것을 언뜻 유치원에서 배웠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초등학교 때 컴퓨터가 연결된 tv로 당근송을 부르던 그 음악 시간에 배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하농을 열심히 치던 꼬꼬마 시절의 내가 배웠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자, 이제 아래 사진을 보면 오른편에 익숙한 단어들이 나올 테다.
(아직도 모른다고 얘기하면 돼요 안돼요?)
그림을 몰라서 그렇지, 글자 자체는 유치원을 다니면서부터 주입식으로 주야장천 암기되어온 우리네의 지식 아닌가. 여기서 솔이 소로, 시가 티가 되었는지는 발음 한 번 해보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은 앞에 설명 해 놓은 듯, 구강구조가 덜 완성되어 종성을 발음하기조차도 힘든 어린이들이니까. 그럼 여기서 우리는 언뜻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들을 대상으로 이런 걸 만들었단 말이야?
이 교육법을 창시한 사람은 유아기 때의 음악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유아의 언어 능력이 정착되는 3~7살까지의 기간 동안에 유아는 언어뿐 아니라 음악적 능력도 같이 반드시 습득을 해야만 훗날 ‘음악적 장애자’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그는 유아들을 위해 이러한 교육법을 담은 여러 서적들을 발간했으며, 그 안에 담긴 전통 민요들을 정확히 부르기 위해 이 손 기호들을 창시해낸 것이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가 이 교육법을 제시했는지, 교육법 안에 왜 민요가 들어있는지, 왜 이런 교육법을 만들어야만 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나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노래를 했고, 그리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자주 노래를 했다. (...) 4살 때 나는 처음으로 작곡을 했다.
1882년 12월 16일.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노래를 했고,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이 아이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 음악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쳐 나간다. 취미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하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그 아이는 딱히 그렇다 할만한 선생님 없이 빠른 속도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까지 섭렵한다
당시 비주류들이었던 집시와 가난한 농민들의 노래를 서양의 전통적 어법에 맞추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그는 바로 바르톡과 더불어 20세기 초의 새로운 작곡 어법을 주도하던 헝가리의 국민 작곡가 '졸탄 코다이'다.
코다이는 유년 시절부터 여러 방면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수재였다고 한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교내 문예 대회에서도 입상을 할 만큼 전반적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학생이었다.
그는 1898년, 16살의 나이에 그의 첫 대규모 작품 Overtüre D-moll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을 학교 선생님의 지휘와 친구들의 연주로,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다. 그가 다니던 학교는 소도시의 규모가 작은 학교였기에,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인원 부족이란 문제로 편성이 불가피하게 바뀌었지만, 오보에의 선율을 바이올린이 넘겨받아 연주를 하고, 작곡가 본인이 스스로 첼로와 타악기를 연주하며 무대를 마무리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던 코다이는 졸업 후 선생님이 되어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친구의 조언대로 법을 공부해 당시 상위층의 직업이었던 법조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로 대학교 입시를 위해 떠난다.
지금 시대의 음악은 독일어로만(!) 가득하다. 헝가리의 문화를 사용하고 싶어도, 정작 헝가리어를 할 수 있는 음악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 후 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으로 삼으며 아마추어 연주자로서 음악을 꾸준히 지속해오다 1902년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 후, 당시 독일인 교수였던, Kössler의 지도하에 바르톡과 함께 작곡 공부를 시작한다.
코다이의 지도 교수 Kössler는 그에게 헝가리 음악이란 Brahms - Piano Quartet No.1 in G minor, Op.25 의 마지막 악장처럼 절제와 지향점이 뚜렷해야 하며, 다양한 지점에 여러 가지각색의 색이 나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코다이는 당시 독일이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유럽의 음악계를 그리 좋게만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의 음악계는 독일어로만 가득하다고, 음악에 헝가리의 색채를 이용하고 싶지만, 막상 헝가리어나 문화를 이해하는 연주자와 음악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라며 종종 투덜댔다고 한다.
슈만의 음악 신보 모임이나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의 만남처럼, 그 당시의 유명인들이 그렇듯 코다이도 그의 성공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인문 대학을 재학 중이던 시절 알게 된 친구였다. 작가였던 그 친구는 코다이에게 자주 시나 소설을 선물했고, 사람들은 그가 훗날 코다이가 헝가리 민요 가사의 구조를 분석하거나, 현대적인 해설을 덧붙이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코다이의 가장 소중한 지인이었던 그의 부인 Emma Gruber 은 그녀 자체로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훌륭한 음악가였다. 이미 독일의 여러 콩쿠르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입상을 하고, 음악계 내에서 꽤 높은 입지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훗날 코다이가 엮어낸 민요의 모음집을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출판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1905년 8월, 코다이는 음악원 동기였던 바르톡과 함께 지역의 모든 민요들을 사람들의 입에서부터 전해 듣고, 그것들을 기록하기 위한 채집 여행을 떠난다.
당시에 헝가리 지역의 민요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통상 "Liederbäume"(직역하자면 ‘노래하는 나무들’)라고 불렀는데, 바르톡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 한 달 동안에만 그들은 '노래하는 나무들' 에게서 150개의 민요를 수집한다. 그중 13개의 곡을 출판함으로써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그들의 민족 음악을 구체화 및 실체화시키게 된다. 또한, 세계 1차 대전 전 마지막으로 갔던 수집 여행에서 그들은 Bukowina(루마니아 북쪽 지방)의 동쪽 국경 쪽에서 “Hora", "Colinde" 등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계승되어온 여러 종류의 음악 200여 개를 기록하는데, 이는 일종의 폴카와 왈츠와 같은 춤곡이며, 전통적인 루마니아 지방의 캐럴이나, 노동요, 또는 아이들 놀이에 사용된 멜로디 등이 포함된다.
코다이와 바르톡은 꾸준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같이, 혹은 따로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기와 축음기와 같은 현대 문물을 이용해 서로의 기록물을 공유하며 그들의 진정한 민족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다.
1914년, 여유롭게 스위스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코다이에게 날벼락같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코다이는 산에게는 목소리가 있다고 말하며, 휴가 동안 스위스의 산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의 동맹군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군이 4년간 맞서 싸운 결과, 1,0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희생된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라벨의 작품과 함께, 세상에 남아있는 바이올린, 첼로의 2중주 중 수작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Duo for Violin and Cello op.7 은 코다이가 짐을 꾸려 부다페스트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쓰인다. 코다이가 그 당시 제일 유명했던 발트 바우어 콰르텟의 제1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병사들에게 며칠을 붙잡혀 있은 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척박한 땅에서 수레를 밀며 집을 향해 가는 동안 그는 문득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듀오를 작곡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이라 작곡을 위한 책상도 없었고, 심지어는 종이조차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땅바닥에서 단 한 장의 종이로 곡의 스케치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건 카더라임)
(독일의 영재 교육원(?) 느낌의 Kronberg Academy에서 학생들이 op.7을 연주한 영상. 링크는 2악장으로 걸어놓았다. 서늘한 바람에 타고 나오는 피리 소리 같은 멜로디와 황량한 산과 혼란스러운 내면을 떠올리게 하는 음색이 인상적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상은 두 개로 갈라졌지만 음악가들은 이미 잘츠부르크에 모여 과거의 적들과 서로 악수를 하고 있었다.
- in 1922, Zoltán Kodály
앞서 그의 선생, Kössler의 자리를 이어 바르톡과 함께 부다페스트 국립 음대 교수의 자리를 맡고 있던 코다이는 전쟁이 시작한 이후로도 꾸준히 헝가리 민속 음악 연구와 작곡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4년 후 전쟁이 끝난 뒤 그는 1922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실내악 페스티벌에 참가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op.8와 op.12를 초연하며 현대곡 작곡가로서 많은 호평을 받는다. 여전히 냉기가 어린 국가 관계 속에서도 그들은 음악가로서 어제의 적들과 스스럼없이 인사하며 각 나라의 문화를 나누고 서로를 배워가고 있었다.
코다이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독일 바이로이트(1904년)와 프랑스 파리(1906년)로 음악 공부를 위한 여행을 떠나는데, 그는 그곳들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며 그 당시 독일을 대표하던 작곡가 바그너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의 음악을 배운다. 당시 음악계에 동양풍의 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소개하던 드뷔시의 음악을 듣고 코다이는 특정 민족만의 색채에 매력을 느끼고, 자신의 나라에서도 그 특별함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와 반대로,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가한 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유난히 좋아했지만, 그러나 바그너의 작품이 그의 작곡 기법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현대음악 페스티벌에서 극찬을 받았던 op.8의 3악장이다. 스코르다투(scordatura) 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곡은, 첼로 현의 낮은 두줄 G,C 을 반음씩 내려 연주하게 되어있다. 이 기법을 사용하면 원래 현악기가 가지고 있던 줄의 텐션이 느슨해져 악기의 음색과 울림이 달라지게되는데, 코다이는 이를 이용해 완전한 5도 간격의 “라레솔도” 의 울림보다 더 러프한 느낌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 (헝가리의 민속적인 색채를 듣고싶은 사람은 2악장을 검색해서 들어보셔라. 3악장은 그냥 내가 좋아해서 넣은 것..)
https://www.youtube.com/watch?v=tzmyZGgyJHw&feature=youtu.be
1,3악장은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메인 주제곡으로도 사용되었다.
음악교육은 가능한 빨리, 심지어는 태어나기 9개월 전부터 엄마의 뱃속에서
이뤄져야합니다. 그보다 더 좋은건 그 엄마가 태어나기 9개월 전 부터 입니다.
1차 전쟁이 끝나기 직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해 공산주의 국가의 길로 들어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될까, 음악을 계속 공부할까 고민을 했을만큼 ‘가르치는 것’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코다이는, 이 무렵 다시금 지도자로서의 마음을 다잡게 되는데, 그것은 국가체제가 공화국으로 바뀌면서부터였다.
그는 평생동안 '모든 사람이 음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의 시작은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었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코다이는 작곡가로서의 역할보다 교육자로서의 역할로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 그는 어른들의 음악적 역량이 부족한 이유로 어린 시절 음악 교육의 부재를 꼽았는데, 그는 갓난 아이들이 말을 배우듯, 음악교육도 어렸을 때부터 진행되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는 태어나기 전부터 뱃속에서 음악교육을 해야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태교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게 이때부터였나..)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음악 교육쪽으로 눈을 돌린 이후 그의 작곡가로서의 삶은 조금 주춤하게 된다. 어떤 이는 "음악계는 교육계로부터 코다이를 빼앗겼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교육계에 바친 열정은 대단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음악원의 총장의 자리와, 헝가리 음악 연맹 총재의 자리에 오른 코다이는 그가 꿈꿔왔던 본인의 계획들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게 되는데, 그 꿈은 바로 어린이들을 위한 무상 음악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막노동과 우유 배달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던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상 음악 교육을 제공하던 코다이는 곧 그 아이들이 교육은 받을 수 있지만, 그 교육을 위한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않는 값비싼 악기들을 구매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악기가 없어도 가능한 합창 음악등에 주력하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나온 그의 교육법 중 하나가 계명창이다.
사실 목소리라는 것은 무엇보다 가장 좋은 악기이다. 음악을 작곡하는 이와 연주하는 이, 그들은 악기로 소리를 내기 전 목소리로 음악을 스케치 한 다음, 악기로 그것을 완성시킨다. 바흐의 스페셜리스트라고 칭해지는 피아니스트 굴드가 종종 연주 때마다(종종은 아니고 늘 그런다) 이상한 음의 목소리를 내면서 연주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음악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었으며, 사람의 가장 간단한 표현 수단인 목소리로써 음악의 흐름과 호흡, 아티큘레이션을 가장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다이는 그가 20대에 다녔던 민요 수집 여행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놀이를 위해 사용되던 민요들(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에서 착안을 해 그의 교육법의 일부로, 대대로 전해져 오던 민요를 노래하는 것 을 제시한다. 민요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정서를 오롯히 가지고 있는 그 나라의 그릇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코다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상 속의 음악 교육, 어머니에서부터의 교육. 이라는 그의 교육 철학에도 딱 들어맞았기때문이었다.(외국인이 우리나라의 '동대문을 열어라'라는 곡을 들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 알맞은 것을 2가지 이상 서술하시오.(3점))
그의 음악의 특징은 풍부한 멜로디와 완벽한 음악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센스,
그리고 멜랑꼴리와 불완전한 감정으로부터 완성됩니다.
(...)
그의 음악에 있는 모든 것은 균형의 원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새롭죠.
- Béla Bartók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바르톡의 후기 음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두 말할 것 없이 바르톡의 음악은 단연코 현대 음악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현악기의 타악기적인 면과 쇤베르크의 음렬주의 작곡법을 융합시키며 작곡을 했던 바르톡과는 달리 코다이의 음악은 균형과 원칙을 따라 만든 우리가 전형적으로 아는 클래식에 가까운 음악이다. 낭만주의 음악이 익숙해 무뎌지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음악의 발판이었던 '12음계'가 발표되던 그 혼란스러운 시기로 인해, 과거같이 여행을 떠날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 그 둘의 작곡 화풍 또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드뷔시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코다이의 음악은 잘 들어보면 확장된 드뷔시의 음악과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드뷔시의 음악도 인상주의적인 색채가 뚜렷할 뿐, 형태가 일그러지거나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의 느낌은 아니지 않은가.
코다이의 민족음악은 바르톡의 민족음악보다는 더 좁은 의미의 민족을 뜻하는데, 바르톡에게 민족 음악이란 동유럽 전반의 농민 음악이 그 대상이었다면, 코다이의 민족음악은 다른 동유럽도 아닌 그저 헝가리의 음악만을 음악을 뜻한다. 일찍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 다소 이른 나이에 생을 떠난 바르톡과는 달리, 코다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헝가리에서 음악가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면서까지 부유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다가 1967년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 그가 수많은 헝가리 태생의 작곡가들 중에서도, 헝가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가가 된 이유이다.
만약 말년의 코다이가 성악에 관심을 두지 않고, 기악곡에 더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면 그가 중년까지 남긴 그의 대표곡들과는 다른 새로운 화풍의 곡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그는 음악이란 자연스럽고,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만인의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는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였든, 우리는 그로부터 얻은 것이 너무나 많다. 비록 공산주의라는 틀에 갇혀있었다 하더라도 어린이들에게는 무상으로 음악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의 발언은 가난한 자나, 음악에 관심이 없는 것을 당연시했던 이들에게 어렵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클래식의 문을 개방시키는 계기였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