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Bell
겨울의 어느 아침, 한줄기의 빛으로 반짝이는 호숫가에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물 위로 떠오르는 빛과 그 빛의 그림자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골 마을의 작은 길은 연말을 맞이해 아무도 없이 조용히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누군가 내게 유럽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하나만 꼽아달라 한다면 나는 항상 그날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맞이한 작은 성당의 종소리를 꼽는다. 채도 높은 오색 빛으로 빽빽이 들어찬 자연 위에서 맞이한 청량하고 소박한 종소리는 유럽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저 그런 평범한 종소리였다. 마음이 분주하다면 쉽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그런 작은 종소리. 그리고 그 아무도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맞이한 몇 번의 적적한 울림은, 가야 할 곳도 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바람 안에서 흔들리던 내게 그리 유난하지 않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겨졌다.
화려해야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누구보다도 유난하지 않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사실 유럽이라고 해도 도심의 성당에서는 종이 그렇게 자주 울리지 않는다. 평일에는 주로 삼종기도를 위해 하루에 3번 정도 울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 그마저도 관광과 생업을 위해 그 어느 때도 종을 울리지 않는 성당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시간마다 15분에 한 번씩 4번 종이 울린다는 것은 아마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시골적 허용(?)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바라보자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자유라 여기는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종이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과거에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권력자들에게 이익들이 서로 얽혀, 점령과 과시의 용도로 사용된 종은 교통의 발전에 의해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 나를 과시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과거의 종은 현대에 들어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평화의 상징으로써 그 의미를 바꾸어 수명을 유지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종이 타인에게는 부정적인 역할로서의 의미였지만, 반대로 그들 내부 조직 안에서는 평화의 상징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 탄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대로 권력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과학적으로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소작농들을 부리는데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권력자들은 소작농들에게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시간의 흐름을 무지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며 그들에게 규칙적인 삶의 안정성을 알리고, 어둡고 스산한 밤의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믿음과 희망을 건네주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소작농들의 일 효율성 또한 높아지는 것은 그들에겐 두말할 나위 없는 장점이었을 것이고. 이처럼 조금 더 능률적인 삶을 위해 과거 유럽에는 시간을 알리는 주목적을 가질 뿐 아니라 여러 부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의 종들이 존재했었다. 서울의 사대문처럼 성문에 달려 성문 밖 소작지 하루 일과의 종료를 알리며, 성문을 닫는 시간을 알렸던 Torglock를 비롯해 Marktglocke(시장 종), Ratsglocke(시청 종), Kirchenglocke(교회 종) 등 각자의 목적을 가진 종들은 그들의 삶 속에 떼어놓을 수 없이 녹아있었다.
1) Torglocken(성 출입구의 문 닫을 시간을 알리는 종)
2) Marktglocke(시장의 개장과 폐장을 알리는 종)
Niemand sollte vor der glocken kaufen,
ausgeschlossen hunner vnd dyer bey VI. gl. buße.
- 지정된 자를 제외하고선 아무도 마켓 종이 울리기 전에 구입할 수 없음. (in Chemnitz, 1607)
현대에 이르러서도 오전 9시만 되면, 증시 개장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널리 퍼지듯, 과거의 사회에서 또한 marktglocken은 여전히 시장의 개장과 폐장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실재하지 않는 디지털 세상 속 숫자들일 뿐인 현대의 증시와는 달리 과거의 마켓이란 밀가루나 술, 생활을 위한 자재들을 사고파는 말 그대로의 시장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부패할 수 있는 어패류나, 주로 일과를 끝나고 맞이하게 되는 주류 품목들은 기타 물품으로 허용되어 장을 개시하는 marktglocken이 울리기 전 거래가 가능했다.
3) Bierglocken(Weinglocken) / Wächter Glocke(통금종)
In Zittau ist die sogenannte Bierglocke eingeführt, so bald solche des Abends um 9. Uhr geläutet wird, und es begiebt sich als dann aus denen Bier und Schenck Häusern nicht Jedermann nach Hauß, sondern wird hernach von den Circul Meister darinn noch sitzend gefunden, so wird er in Gehorsam geführet, und muss nebenst dem Stock Geld auch noch 12 Groschen Straff, der Wirth aber 1. Schock geben.
<Glocken und Glockenspiele> - Prisma Verlag Gütersloh
Bierglocken은 일명 맥주종, 혹은 지역에 따라 Weinglocken(와인종), Wächter Glocke(통금종)이라고 불린 금주 시간의 시작을 알렸던 종이었다. 이 종은 저녁 9시 이후면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술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종류의 종이었는데, 저녁 9시에 이 종이 울리고 나면 손님들은 내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단속원들은 매장을 둘러보며 남아 있는 손님들과 매장 주인에게 벌금을 메겼다고 한다. 하지만 영업점이 아닌 길거리나 마켓에서 판매하는 주류는 섭취가 가능했다고.
4) Turmglocken(탑에 위치한 종) / Kircheglocken(교회 종)
Turmglocken 이란 도심에 지어진 중심 탑에 설치된 종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는 주로 교회나 성당, 혹은 시청의 탑 등에 설치돼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다시피 Turmglocken의 크기는 다른 종들에 비해 매우 크고 웅장했으며, 종의 개수 또한 여러 개의 종으로 화음을 만들어 연주할 수 있도록 수십 개의 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마을의 축제나 전쟁, 또는 종교적인 행사를 비롯한 여러 상황들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종이었으며, 과거 중세의 유럽에서는 이 종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곳이 비로소 영지의 경계선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Turmglocken은 각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서 도시의 번영과 재정 상태를 직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됐다.
(다음 편 2. 종을 위한 음악 Glockenspiele ; Turmglockensp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