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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e Jan 06. 2021

음악에서 음을 뺀다면,  음악에는 무엇이 남을까?

케이지, 4분 33초 (우연성의 음악)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


우리가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곡 중에 "음악에 음이 없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서 나온 결과물이 하나 있다. "우연성의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1950년 경에 발표되어진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라는 곡이다.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청중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 그 곡은 연주장 내에 흐르는 고요한 공기의 소리와 관객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부스럭거리는 소음까지 음악의 일부로 본다.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4분 33초는 그 어디에도 절대적인 것(ex.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존 케이지의 의도로 인하여 만들어진 곡인데, 이 새로운 경계선에 걸쳐져있는 혁신적인 곡은 과거의 형식 속에서 굳어져 가던 음악의 의미를 본질에서부터 끝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아무리 12음계를 사용한 당시의 현대 음악과, 새로운 물건들을 이용한 현대곡들이 청중이 예상하지 못 할 만한 진행으로 작곡이 되었다고 한들, 존 케이지에게는 그 음악들 또한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일 수 없는 똑같은 과거의 우물이었던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대로 정해진 틀 안에서 진행되어가는 과거의 음악과는 달리, '우연성' 이라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사건들을 시간과 장소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것. 작품 속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창작자를 지우고 또다른 다수의 창작자들을 만들어 내는 '우연성의 음악' 이란 예상치도 못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하다가 역설적이게, 그렇게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20세기의 새로운 인류의 시선으로 사람들에게 극단적으로 음악의 본질을 깨닫게 하며, 음악이란 어디까지 음악이라 할 수 있는가.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하는 계기가 된다.






Cage는 이제 음악작품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화두에 올렸을 뿐 아니라,
음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까지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또한 한 편으로는 현혹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작곡가가 이 당시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란,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중동] - 윤이상






1958년 독일의 한 도시, Darmstadt에서 개최된 “Internationalen Ferienkurse” 에는 윤이상과 존 케이지, 불레즈, 슈톡하우젠 등 현대 음악사에서 아직까지도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현대 음악 작곡가들이 대거 참석한다. 윤이상은 자신의 글 ‘정중동’을 통해 존 케이지의 곡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위와 같이 고백한다.




당시의 독일은 전쟁 직후, 패전국으로서 기존의 사회 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의 재건설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독일 문화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계까지 연결된다. 기존의 근음 중심의 화성 구조와 형식은 무시한 채, 12음(도에서 다음 옥타브 도까지 검은 건반 포함해 총 12개의 음을 가지고 있음) 모두를 음악 안에서 공평하게 나누어 사용하겠다는 쇤베르크식 음렬주의는 새로운 음악계의 흐름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후에는 되려 ‘이것은 음악이 아닌 시스템 속으로의 도피이다.’라는 평을 받으며 음향, 더 나아가서는 소음을 음악의 부분으로 사용하며 꽤 오랫동안 유지되던 음렬주의의 시스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되게 된 것이, 바로 존 케이지와 불레즈의 ‘우연성의 음악’이다.



그리고 '도,미,솔' 과 같이 작곡가에 의해 통제된 음이 아니라, 정해진 구역 안에서 누를 수 있는 무작위의 음들을 모두 동시에 누르는, 1차 창작의 분야에서조차도 연주자의 재량이 허용된 톤 클로스터(tone cluster)를 시작으로 음악은 작곡가를 위한 일방적인 방향으로써의 음악이 아닌, 청중과 외부를 창작의 영역에 포함하는 쌍방향의 음악으로 노선을 바꾸어 발전하게 된다.









사실 음악이란 것은 그저 듣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르는 아니다. 지금이야 녹음 기술의 발달로 청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축음기라는 것이 발명되기 전에는 음악이란, 시각과 진동을 느끼는 감각 등 총체적인 여러 감각들을 통해 즐길 수 있는 종합적인 무대 예술이었다. 유한한 시간 내에서 여러 감각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통틀어 지칭하였을 때 그것이 비로소 음악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




음악에서 음을 뺀다면,  음악에는 무엇이 남을까?




'우연성의 음악' 이란 주제에서 시작된 그 질문은 사실 새로운 음악 세계의 문을 연다기보다, 과거 음악이 내포하고 있었던 본질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그 옛날, 그저 하나의 이상한 억양에서 시작되었을 음악이란 장르는,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탄생되었기에 음악은 필연적으로 생각과 마음을 담는다.


어떤 이는 존 케이지의 case 에서 찾아 볼 수 있듯, 음악에서 음을 빼면 소음이 남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 곡에서 꼭 소음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대 예술이 그러하듯, 현대 음악 또한 작품의 퀄리티보다는 작품 속의 의미를 더 중요시 여긴다. 그저 우리가 악보를 바라보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책을 읽고 어떤 뭉실한 감정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해내려는 욕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음악에서 음이란, 필수불가결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무의 존재이다.

음악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하다. 내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음이 없는 새로운 개개인의 음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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