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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e Jan 22. 2021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면

세계 2차 대전, 그리고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38 년 3 월 23 일, 바이올리니스트 Viktor Robitsek은 비엔나 필하모닉의 경영진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게 된다.

당신은 오늘부로 오케스트라에서 해고당했습니다.”

그의 해고 사유는 그의 음악적 재능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다만 그는 유대인이었을 뿐이었다.




Robitsek가 해고 통보를 받기 11일 전, 히틀러의 군대는 비엔나로 진군을 했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러나 독일군을 응원하는 다수의 지지자 중 일부는 Robitsek의 동료였고, 그중 절반은 NSDAP 카드를 소지한 나치당원이었다.


나치 통치 아래 진행되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회



2013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 75주년을 맞이해 공개된 비엔나의 국립 오페라 극장의 보관실에서 발견된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 중 빈 필하모닉에서 일하고 있던 유대인 중, 총 13명의 유대인이 오케스트라에서 쫓겨났으며, 그중 5명이 나치 수용소 또는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사망한다.


연주자와 경영진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빈 필하모닉의 특성상, 이 추방은 같이 일하던 대다수의 오케스트라 멤버들의 동의를 얻어 실행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인구수 대비 나치당의 비율보다 빈 필하모닉의 나치당 비율은 확연히 높았는데, 이는 전쟁 중이었던 1942년, 오케스트라의 멤버 123명 중 60명이 적극적인 나치당원이었으며 그중 2명은 SS 회원이었을 만큼 나치의 광적인 신도였다.



제 2 차 세계 대전 당시 추방된 비엔나 필하모닉 유대인 단원들의 이름이 빨간 선으로 지워져있다. (사진 설명 : AFP)


음악은 히틀러에게 매우 중요한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음악가들 또한 그에 걸맞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치의 지지를 얻으면 연주를 할 기회도, 호평을 얻을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을 염두에 둔 대다수의 음악가들이 그로 인해 그들의 경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나치당에 합류한다. 심지어는 아직 나치당에 가입하는 게 불법이었던 1938년에도, 그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과 비엔나 필하모닉 사이에 존재하던 경쟁 때문이었는지, 벌써 대다수의 빈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이미 나치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단원들이 나치당에 몸을 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당시 오케스트라의 회장 격이었던 Wilhelm Jerger는 강제로 이송될 Rathkolb과 그의 아내를 구해달라며 주지사에게 Heil Hitler를 편지에 서명하며 청원 학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Helmut Wobisch (1912-1980)



트럼펫 수석 연주자이자 나치였던 Helmut Wobisch는 열광적인 히틀러의 지지자로, 게슈타포(나치 정치경찰)의 정보원으로 나중에는 SS에 가입할 정도의 친히틀러적인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과거의 친나치적 행위로 해고당했지만 1950년 복직 후, 1954년부터 1968년까지 경영진에서 이사의 직책을 맡게 되고, 그리고 그는 그 공로로 1967년 오스트리아 국가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게 된다.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13명이 해고당하고 5명이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과는 달리, 과거 나치적 행위로 빈 필하모닉에서 해고를 당한 이들은 고작 4명, 은퇴를 한 이들은 6명에 불과하다. 두 명 중 한 명이 나치당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솜방망이의 처벌이 아닐 수 없다.




다들 알고 있듯, 빈 필하모닉은 90여 개국에서 5 천만명 이상의 청중에게 방송되는 슈트라우스 왈츠로 가득 채워진 신년 음악회로 유명하다. 사실 이 신년 음악회는 1939 년 나치 통치 아래, 혼란스러운 전쟁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Strauss의 멜로디를 군부 선전 용으로 이용한 것을 시작으로 탄생된 연주회로써, 사실 빈 필하모닉은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Strauss의 음악을 거의 연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집단 살인 사건 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된 Strauss는 사실 나치가 혐오하던 유대계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비엔나 필하모닉에서 추방  유대인의 


- Julius Stwertka (콘서트마스터, 바이올린 I)
Julius Stwertka는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병합했을 때, 그는 66 세였습니다. 구스타브 말러가 영입한 훌륭한 음악가인 그는 필하모닉의 콘서트마스터(악장)였습니다. Stwertka와 그의 가족은 유대인 게토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몇 주 동안 살다가 1942년 12월에 사망합니다.


- Armin Tyroler (오보에)
Armin Tyroler는 필하모닉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힘든 조건에서 일을 하는 음악가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전해주기 위해 힘써왔던 Tyroler는 1933년 비엔나 시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을 정도였죠.

그가 훈장을 받을 때 한 연설에서 그는 음악가는 고난에서 벗어나야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비엔나를 "사랑받는 도시"라고 불렀고 "노래의 도시, 행복의 도시"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1942년 Stwertkas와 함께 Theresienstadt로 추방됩니다. 유대인 게토에서 Tyroler는 유대인 문화 조직을 설립하고 여러 콘서트에 참여했지만, 1944 년 10월 28일 아우슈비츠로 추방됩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는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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