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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Apr 12. 2021

퇴근길, 추억과 명품 사이에서
고민이라면

세상의 어둠으로 삶을 돌아보고 싶다면 ③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집 떠나 유랑하는 불효녀의 최소 의무로서 부모님께 매일 행선지를 보고했지만, 이 날만큼은 조용히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향한 곳은 바로 체르노빌, 1986년 4월 26일에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소련에 속했던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4기가 폭발하면서 대규모의 방사능이 노출되는 참사가 일어난 곳이다. 이로 인해 31명 즉사, 그 후 5년간 7천여 명 사망, 70여 만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20세기 최악의 참사 중 하나다. 



투어 회사에서 말하길 ‘일일 투어 후 노출되는 방사능량이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탔을 때 노출되는 양과 같다’고 했지만 ‘투어 후 건강 상의 문제에 대해 면책된다’는 동의서에도 서명을 요구했다. 혹시 모를 위험과 호기심 사이에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일일 투어를 다녀오기로 결정했고, 위험을 감수하는 경험이 헛되지 않도록 사전에 관련 내용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상기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도 키예프에서 차량을 타고 두 시간 정도 달려 체르노빌 체크포인트 앞에 도착했다. 신원 확인을 끝낸 뒤 차량에 올라 첫 번째로 피폭 피해 마을 중 한 곳을 방문했다. 30년 넘게 방치되어 유령 마을처럼 스산하게 폐허가 된 마을, 당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대피해야 했기에 30년 전 그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당시의 물건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들었고, 혹시 주변 물건이나 잎사귀 하나 몸에 스칠까 잔뜩 긴장했다. 



소련 군사 기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냉전의 산물인 ‘레이더’를 보았다.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사전 포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마법 때문인지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목을 꺾어서 한참을 올려봐야 할 만큼 규모가 크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 것처럼 남아있는 모습에 당시의 최첨단 소재들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단다. 다음으로 유령이 나올 것처럼 스산한 보육 시설을 잠시 돌아본 뒤 참사의 근원지였던 발전소로 향했다. 몇 년 전에 거대한 석관으로 덮어 놓아 원래 형태는 볼 수 없었지만, 참사가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다는 사실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옛 소련 식 칸틴에서 (맛없는) 점심을 먹은 뒤, 체르노빌 마을 중 가장 유명한 유령의 도시인 ‘Pripyat’로 향했다. ‘프리피야트’는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계획된 신도시였기에 주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았고, 공산 체제에서는 볼 수 없는 ‘마트’가 존재하는 등 서구 문화의 실험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가이드가 보여주는 극장, 카페, 강변 유원지, 병원, 고층 건물 등의 사고 발생 전 번화한 도시 사진과,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황량한 폐허를 비교하니 같은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랐다. 나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장소는 놀이공원이었다, 바로 개장을 일주일 앞두고 참사가 발생했기에 사람들의 온기가 스며들 새 없이 화석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새 놀이 공원이 생겼다고 들떴던 사람들의 장면이 그려져서였을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체르노빌 사고의 전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프리피야트 마을을 떠나, 마지막으로 사고 수습을 위해 투입되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탑으로 갔다. 곧 고통을 받거나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을 추념했고, 이제 체르노빌을 떠나면서 이 세상에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키예프로 돌아와 에어비엔비 호스트인 나탈리아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그곳이 너무 가슴 아픈 곳이기에 자신은 차마 방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사고의 당사자나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차마 떠올릴 수 조차 없는 장소겠지. 당시 소련 정부가 체르노빌 사고가 보도되지 않도록 언론을 통제하여 외신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사고 후 5일밖에 지나지 않은 5월 1일 노동자의 날 퍼레이드에 어린이들을 참가시켜 국민들은 분노했다고 한다.  



사실 체르노빌 사고는 예방할 수 있었던 인재였기에, 투어 후 원전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만 프리피야트 마을에서 가이드가 들려준 일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고 발생 후 약 3개월이 지난 뒤 피난 갔던 주민들이 집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돌아왔단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가져간 것은 값 비싼 것들이 아닌 추억이 서려있는 물건들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추억은 죽을 때까지 내 가슴속에 남는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바로 오늘,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2018년 8월에 방문 

★ 1986년 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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