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험주의자 Dec 11. 2022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줘요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330일이 지났어요 ㅠ_ㅠ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 오랜만에 작가님의 시선이 담긴 글을 보여주시겠어요? ꈍᴗꈍ”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난 후 무려 39편의 글을 활발히 올렸던 작년과 달리, 세상에는 글쓰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애써 외면했던 브런치의 메시지. 그렇게 한 해가 지날 무렵에서야 글쓰기를 게을리했던 부끄러움은 흘려보내고, 거의 4년 만에 재개한 나 홀로 해외여행의 추억은 그냥 흘려보내기 싫어서 오랜만에 쓰는 글입니다 :)




△ 콸라룸푸르의 상징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낮에 봐도 밤에 봐도,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위에서 봐도 아래에서 봐도 모두 아름다운.


책상에 앉아서부터 기다린 나 홀로 해외여행 

‘시험에 합격하면 탄탄 국가들(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할 거야’

2019년 여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뒤 꼬박 1년간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만 했다.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는 엉덩이 가벼운 내가 말이다. 이 안타까운 욕망은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긍정적인 동기부여로 승화시킨 뒤, 가끔 중앙아시아 관련 여행 블로그를 보거나 영상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시험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싱숭생숭해서 잠 못 이루던 밤, 나만 보는 블로그 일기장에 접속해서 불과 1~2년 전 장기여행 때의 사진과 글을 보며 복합적인 감정에 눈물을 흘린 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했던 내가 지난 1년간은 참 고생 많이 했네….' 그때의 황홀했던 감정들을 반드시 조만간 다시 느껴리라 다짐하며 잠을 청했던 그 길고도 길었던 밤. 


마침내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의 습격으로 탄탄 국가들 대신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움을 마주해야 했다. 스무 살이 된 이후 1년에도 몇 번이고 해외에 나갔었는데, 2019년 2월 미얀마에서 귀국한 후 나 홀로 해외여행은 거의 4년간 멈춰 있던 것이다. 오히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목포, 경주, 공주, 진주 등 보물 같은 도시들은 여행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거야’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마음 한편에선 대륙 저 너머의 낯선 공기가 전해주는 생동감이 그리웠다. 


그래서 올해 4월 외국으로의 여행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봄은 우울증이 증가하는 시기라고 한다. 나 역시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힘들었던 4월의 어느 밤, 날 구원해 줄 특약 처방을 내리기로 했다. 내년부터 개악된다는 항공사 마일리지도 소진할 겸 보너스 항공권으로 무려 7개월 후의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시기는 한국의 추위와 성수기를 피할 수 있는 11월, 목적지는 8박 9일의 짧은 일정에 적합한 동남아 중 말레이시아에서 안 가 본 도시였던 ‘쿠알라룸푸르’(이하 KL)와 ‘믈라카’, 그리고 이전 두 번의 방문 모두 여행이 아닌 출장 목적이었던 ‘싱가폴’. 


△ 이번에 궁금했던 말레이/싱가폴 음식들을 모두 먹고 왔다 :) 그 중 사진 속 음식들은 로작, 오탁오탁, 테타릭, 카야토스트, 차퀘이테오, 락사, 두리안첸돌.


역시 여행은 준비하는 과정이 제일 즐겁구나 

솔직히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때 되면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다시 봉쇄될지도 모를 일이고, 일주일 간 휴가를 쓸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냥 계획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끔씩 떠올리면 흐뭇한 존재였을 뿐. 또한 한국에서도 열심히 놀러 다니고 있었기에 그 간절함이 조금은 시들해지기도 했던 그런 여행. 


그런데 뒤늦게 시작한 여행 공부는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두 국가 모두 이미 가 본 곳이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 그 유명한 ‘카야토스트’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말레이시아를 관통하는 '페라나칸' 문화 (중국+현지인 문화)도 생소했던 것이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최신 가이드북을 빌려 보기도 하고, 생생정보통 한국인들의 블로그를 읽어보며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목록을 신나게 만들어갔다. 문득 생각해보니 지난 6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녀온 일주일의 휴가는 아무 계획 없이 갔다거나(몽골), 한 곳에 체류하면서 그냥 쉬었거나(발리), 여행사를 통해 갔거나(부탄), 그 밖에는 누군가와 함께했기에 이렇게 순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다채로운 일정을 짜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완벽할 수 없었고 결국 계획한 대로 모두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가 되어 이미 여행을 시작한 듯 준비 과정부터 행복했다. 


△ 믈라카의 해양모스크와 믈라카 강의 야경 / 콸라룸푸르 센터와 잘란알로 야시장의 풍경


나 90개국 여행한 여자인데, 왜 처음 해외여행 나온 것 같지?

전 날 밤 비행기로 도착했기에 다음날 조식을 먹으러 호텔 수영장 근처로 가서야 KL의 따스한 공기를 처음 만났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남아의 포근한 날씨♡ 난 옷을 둔하게 껴입고 몸을 움츠린 채 종종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추운 날씨를 싫어해서 최적의 기온이 25~30도라고 느끼는 완벽한 여름형 인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숙소를 나선 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걷는 순간, 문득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 이 포근한 공기와 가볍고 밝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해 둔 무대이고 난 그 위를 걷는 배우가 된 것만 같았다. 어느덧 10년도 더 넘은 싱가폴로의 첫 출장의 기억과 발리로의 휴가 등 모든 것이 처음이고 신기했던 20대 때의 설렘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고스란히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앞으로는 더 여행 갈 새로운 나라가 없어지고, 여행을 해도 모든 것이 담담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먼 훗날 설사 같은 나라, 같은 도시를 가더라도 마치 처음 만나는 듯 지금처럼 행복을 느끼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내 인생에서 여행이란 영원히 설레는 존재가 되리라는 안도감이 들게 된 것이다. 


△ 싱가폴의 야경, 11년 전 그 날처럼 이번에도 멀라이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지난 추억들을 회상하는 시간


일주일이 마치 3주였던 것처럼  

장기 여행을 할 때는 시간이 많았기에 일정도 느슨하게 잡고 일주일에 하루는 아무 일정 없이 쉬어 갔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짧은 휴가이고 호기심 천국 여행자에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정말 숙소에 와서는 씻고 잠만 자야 했다. 그런 강행군 속에서도 자기 전 ‘오늘도 넘 행복한 하루였다^^ 내일은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생길까’ 미소를 띠면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모두 소화해 내는 과정에서 초와 분 단위로 새로운 감각을 맞이하면서, 나의 시간은 촘촘하게 길어지고 풍성하게 채워졌다. 그래서인지 귀국할 때쯤엔 첫날의 기억이 어느덧 아득해져 마치 3주는 흘러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 순간순간이 다채로운 경험들로 채워져 나의 오감이 신나게 반응했던 시간들. 이토록 내 인생의 시간과 공간을 확장해 주는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이어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외국에서 감상 / 싱가폴의 추억을 빛내준 천사같았던 할아버지


모두들 덕분에 완성된 나의 아름다운 휴가 

일주일의 짧은 일정 속에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첫 시작부터 좋았다. KL 공항에서 시내의 호텔로 가는 그랩(동남아의 우버)을 기다리며 서 있었던 시각은 어느덧 밤 12시. 그 피곤함과 긴장감이 점철된 순간에 만난 운전기사와 나눈 한 시간 동안의 대화가 너무 유쾌해서, 픽업 나온 현지인 친구를 만난 것인가 싶었다. 이후 호텔과 식당, 길거리에서 만난 현지인들도 너무 친절해서 무려 4년을 기다린 나를 하늘이 어여삐 여기시고 좋은 사람들만 보내주신 건 아닐까 생각했다. 믈라카의 해상 모스크에서 만난 한국 드라마 팬들, 유명한 락사 맛집의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어 대화를 나누다가 나중에 펍에서 월드컵 우루과이전까지 같이 본 친구, 싱가폴 야경을 감상하며 사진을 부탁하다가 현지인들만 아는 멋진 스폿으로 안내해 준 친구도 있었다. 


특히 잊지 못할 만남은 믈라카에서 싱가폴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만난 싱가폴 할아버지. 그분이 내가 돌덩이 같은 캐리어와 씨름하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시면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은퇴한 뒤 남는 건 시간이고 걷는 걸 좋아한다며 나의 돌덩이를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30분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가끔 유명한 장소 앞에서 발길을 멈추며 투어 가이드도 자처하셨다. 게다가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대접하려 했는데, 자신도 한국에 가면 한국 친구들이 밥을 사준다면서 먼저 카드를 내미 시기도 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전보다 외국인들과의 대화가 편해졌다고 느꼈다. 나는 일어나 아침을 먹으면서부터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EBS 영어 방송을 들을 만큼 영어를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던 사람이다. 그런데 전 직장에서는 일상처럼 사용하던 영어가 현재 직장에서는 쓸 일이 없어 말이 잘 안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신기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외국어 실력이 향상된 것보다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쌓인 연륜과 더 두꺼워진 낯짝(?)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예전에는 상대의 물음에 잘 대답하는 데 초점을 맞춘 대화를 했다면, 이제는 상대방을 먼저 궁금해하며 질문도 던지고 농담도 던지는 편안한 대화를 하게 된 것이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인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닐까. 


△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어우러졌을 때 얼마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지 보여준 믈라카의 페라나칸 문화


여행이 내게 주는 교훈들

앞서 소개한 싱가폴 할아버지와 식사할 때의 일이다. 싱가폴의 갈비탕 '바쿠테'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뼈에 붙은 고기를 손으로 뜯다가 문득 이거 (깨끗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 싱가폴에서는 이상해 보이는 건 아닌가 싶어, “싱가폴에서도 이렇게 손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나요?”라고 물어봤다. 예전 중동의 한 가정집을 방문해서 사람들이 식탁도 식기도 없이 빵을 바닥에 던지듯 야성적으로 먹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 물음에 미소를 띠며 대답하셨다.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거야” 할아버지는 은퇴한 전직 은행원이었고 한국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연륜을 쌓으셨을 분의 말씀이어서인지 그 의미를 한번 더 곱씹어 보게 되었다.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도 모르게 불필요한 눈치를 얼마나 많이 보며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두뇌를 자극해 준다.  


너무 즐거워서 자처했던 강행군이었지만 여행 후반부에는 확실히 체력이 고갈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고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 정보를 찾아보고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과정도 슬슬 피곤해졌다. 굳이 이런 노력들을 하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나의 일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내 일상 속에는 달콤한 집뿐만 아니라, 백수 신분이었던 장기 여행 때와 달리 직장의 든든한 책상도 기다리고 있다. 귀국하면 나를 포근하게 맞아줄 이런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행은 세상을 향해 마르지 않는 나의 호기심을 해소시켜 주고, 더 풍요롭고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준다. 다시 한국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나는, 외국인들과 농담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더 열심히 외국어 공부를 할 것이고, 페라나칸 문화를 만난 뒤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듯 여행으로 얻게 된 새로운 관심사와 영감을 나의 일상 속에서도 적용해 볼 것이다. 소중한 일터에서 돈도 열심히 벌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튼튼한 두 다리로 잘 걷기 위해 건강 관리도 열심히 할 것이다.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만 많이 만날 수 있도록 착한 일도 많이 하고 타인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해서 좋은 카르마를 쌓을 것이다. 그리고 나 홀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여행의 행복한 순간들을 함께 나눌 것이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온 대사처럼, 여행은 이토록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




작가의 이전글 그리운 나라 시리아, 그리고 나의 이십 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