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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왜 MBTI에 열광할까? (feat. 토머스 쿤)

*MBTI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작성한 뇌피셜 및 뻘글입니다. 이 점 참작하시며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구상에는 70억 명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여자 아니면 남자(트렌스젠더니 뭐니 하는 사람들 제외). 어머니의 뱃속에서 성별이 한 번 정해진 이상, 죽을 때까지 그 성별이 바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별 분류법을 의심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성별은 불변한다.


반면 성격은 어떨까? 우리의 성격이란 것은 우리의 주변 사물들(및 사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무엇이다. 우리가 어제 건드린 사물과 오늘 건드린 사물이 서로 다르고, 심지어 그 개별 사물도 매일 같이 변한다. 인간은 매일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연한 사고 방식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성격은 한 사람의 내면보다는 겉으로 관찰되는 행동으로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이 느긋한 마음을 품고 시행한 어떤 행동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급한 행동으로 내비친다면, 그 사람은 그냥 성격 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성별을 분류하는 XX, XY 염색체와는 달리 성격을 딱 잘라 분류할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껏 합의에 의해 기준을 마련한다 해도, 사람의 사고방식은 매우 가변적이기에 특정 분류 안에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 '1분 안에 사탕을 5개 먹는 사람은 급한 사람, 1분을 넘겨서 사탕을 5개 먹는 사람은 느긋한 사람'이라는 기준을 세워 봤자, 관찰 대상이 그때그때 사탕 먹는 속도를 달리 하여 기준을 마구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격은 개인이 걸어온 행적이다. 이 세상의 성격 유형은 16가지가 아니라 70억가지로 분류된다. 아마 각 개인의 성격을 글로 남긴다면 서울대학교 도서관 16 채 분량으로 쏟아질 것이다. 인간의 미식축구공처럼 튀는 성질을 깊이 맹신하는 나로서는 MBTI 트렌드가 못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혈액형별 성격 광풍을 한 차례 맞아 본 탓인지 MBTI 열풍이 낯설지가 않기도 하다. 현재 둘의 위상은 어떨까? 전자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면, 후자는 그 대체제로서 톡톡히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둘이 어떻게 다를까? 일단 전자의 유형 갯수가 4라면 후자의 유형 갯수는 16이다. MBTI 유형을 모두 외우지 못한다면 관련 대화에 끼기 힘들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으면서도, 더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O, A, B, AB만으로 설명되지 않던 것들을 해결해 주는 인상을 준다.


놀랍게도 혈액형별 성격론은 한계와 반례가 금방 드러났음에도 지금의 MBTI와 같은 위상을 꽤 단단히, 그리고 꽤 오랫동안 유지했었다. 어떻게든 기존 틀에 그 반례를 끼워맞추면서 명맥을 이어 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A형은 소심해야 하는데, 안 소심해 보이는 A형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소심해 보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서 일부러 대담함을 연기하는 A형'과 같은 사족이 붙는 것이다.


토머스 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혈액형별 성격론은 '정상과학'이었고, 사족 붙이기는 '퍼즐풀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족은 정리가 안 되는 수준으로 불어났고, 지식 모델로서 더 발전하기 힘든 국면에 도달했다. 이 때 발생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바로 MBTI의 등장이었다. 4개의 유형과 사족만으로 정리되지 않았던 성격들이 16개의 유형으로 세분화 및 정리되면서 보다 정확한 분석 모델로 급부상한 것이었다.

※뉴턴의 물리 공식은 '정상과학'으로서 후배 과학자들에게 숱한 '퍼즐풀이'거리를 남긴 전례가 있다. 일례로 피에르-시몽 라플라스(1749 - 1827)는 뉴턴의 음속 공식의 오차를 알고 있었음에도 공식 자체를 손 보는 대신, 온도의 영향이라는 조건을 추가시키면서 이를 수습했다.


하지만 정말로 보다 정확해졌을까? 토머스 쿤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현대의 니즈에 맞춰서 안경을 갈아끼우는 과정일 뿐, 객관적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은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MBTI 또한 사람의 성격을 새로이 분류해 줄 안경에 불과할 뿐, 보다 객관적인 성격 파악에는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전술했듯 한 개인의 성격은 온갖 언어를 동원해도 한 번에 파악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그렇다면 성격 얘기가 나올 때마다 MBTI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숙한 바보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진 않다. 그들은 MBTI의 암기를 통해 지적 성취감을 누린다는 점에서 공룡들의 종류를 달달 외우는 내 딸과 닮았다. 그들은 MBTI를 통해 삶의 활력을 꽃피우고, 이를 즐거운 대화거리로 삼는다. 그러니 어리숙한 바보보다는 귀여운 바보라는 표현이 잘 맞을 것이다.


아니, 바보라는 표현도 옳지 못하다. 그들과 나는 그냥 착용하고 있는 안경이 다를 뿐이다. 사실 수많은 타인을 만나며 신속한 성격 파악(다소 정밀성은 떨어지겠지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혈액형별 성격이나 MBTI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다. 그들은 성격 분류 체계를 십분 활용하여 덕을 보는 셈이니 오히려 똑똑하다고 여겨져야 한다.


그리고 성격 파악이라는 활동은 우리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 MBTI를 믿는다면 그 사람이 허당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지적 에너지를 보다 중요한 다른 활동에 쏟느라 MBTI의 허와 실을 파악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MBTI에 대한 낙천적인 반응에 함께 어울려 즐기는 방안 역시 삶의 지혜로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MBTI가 나한테 과학이 아니라고 해서 남한테도 과학이 아니란 법은 없다. 애초에 성격이라는 개념이 주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 그들의 주관적 경험상으로는 현실과 잘 맞아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MBTI에만 의지하는 습관은 그 누구에게도 과학적인 습관이라고 할 수 없다.


"네가 소개해 준다고 했던 분 프로필 보니까 MBTI가 'C4 타입 델타파이 포름알데히드'더라. 나는 '허리케인 비너스 NFL 포티나이너스'라서 그 분이랑 안 맞을 것 같아. 소개팅 취소해." ※모두 가상의 MBTI입니다.


만일 인맥이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이 위와 같은 미련한 사고 방식을 품는다면 좋은 인연의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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