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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대한민국에 인문학 열풍이 사그라든 이유

뇌피셜이 다수 포함된 의견입니다.

캐쥬얼 정장에 소형 마이크를 착용한 강사가 방송 세트장 무대에 오른다. 모두가 입을 다문 가운데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이 자신의 목소리를 관객에게 퍼뜨린다. 시시한 농담에 껄껄대는 관객들, 계몽된 지식에 환희하는 관객들이 차례차례로 카메라에 담긴다. 클라이맥스가 다가오면 강사는 속이 뻥 뚫리는 대사를 시원하게 날려 준다. 모두가 대단한 것을 한 날 한 시에 같이 배웠다는 연대감을 느끼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내고, 강사는 헐떡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물병을 원샷한다.

대한민국의 인문학에는 잘 짜인 각본과 같은 카타르시스가 있다. 역경으로 시작해서 인도, 깨달음, 행복으로 끝난다. 여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누구나 인문학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심어진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영감을 받은 인문학적 주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간성'이 결여된 공간들을 수색하고, 재해석하고, 비판한다.

'사이버'와 '관료제'는 정서적 유대감을 배제하고, 인력을 불합리하게 소모한다는 점에서 기술 진보의 어두운 부작용으로 취급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전 인문학이 떠오르고, 부족한 뒷심에 대비하기 위해 '커피향(커피가 아니라 커피'향'이다)'이나 '타자기' 같은 노스탤지어적 키워드가 소비된다. 옛 사람으로부터 인간상을 음미하고, 기계에 저항하면서 나다움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소위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인문학적 주체다.

그들은 스마트폰의 액정과 사무실의 탁한 전등에서 도피하여 봄날 햇살을 찾았다. 하지만 소위 인문학적 주체들도 한민족 특유의 성질 급한 DNA만큼은 극복하지 못한 탓일까? 그들은 타자기 옆에서 커피향을 맡으며 책을 폈으나, 오래 가지 않아서 여유를 잃었다. 인도, 깨달음, 행복을 얻기 위해 인문학을 시작했건만 원하던 목표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지 않았고, 곧 흥미를 잃었다.

그럼 인문학이 약속하던 행복은 왜 빨리 다가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애초에 인문학 자체가 행복을 주는 학문 분야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주체를 자처하던 자들은 성미가 급한 멍청이라서 흥미를 잃은 게 아니라, 오히려 똑똑해서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하는 유목민처럼 다음 흥밋거리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들을 인문학의 공허한 약속으로부터 구출해 준 매개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멸시했던 '사이버'였다.

인문학 강연을 펼치던 무대는 곧 심판대가 되었다. 나팔수들은 인문학을 배워야 정신이 풍요로워지고, 정신이 풍요로워져야 통찰력과 리더십이 생긴다고 현혹해 왔지만, 똑똑한 네티즌들 때문에 재미를 오래 보지 못했다. 네티즌들은 고전 인문학을 인용하지 않고도 나팔수들의 오류를 찾아냈고, 웃음거리로 소비했다. 강연자들이 무대에서 추방된 이후 인문학 뉴비들은 불편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커피향과 타자기를 버리고, 관료제적 조직 체계와 정보화 사회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적 풍요로움과 나다움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인문학은 취향이 맞는 사람들에게나 즐거움을 주는 오락거리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의 실체를 부정하고, 오히려 그것이 대단한 성공의 열쇠라도 되는 것마냥 부풀렸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것도 한계가 매우 극명한 기현상이었고, 다행히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끄는 주도권은 인문학을 책과 강연으로 공부한 자들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삶을 이어가고, 사회 주요 현안들을 공론화하고, 타인에 대해 몰랐던 점들을 배우는 등 인문학적 정신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시민들에게 주어져 있다.

인문학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다시 매니아 층의 오락거리로 돌아갔다. 나팔수들은 전국 각지의 군부대 강당, 기업 세미나실 등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게 정상화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이전의 관심이 나팔수들의 현혹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몰린 것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대한민국 인문학의 사령부에서 저지른 실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고 말았다.

<철학연구> 저널에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homomorphism)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해당 논문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관음충이라는 비하적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실태와 원인에 대해 조사한 게 아니라, 아예 한국남성 전체를 관음충으로, 남아들을 관음충 유충으로 못박아 둔 소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무려 파리 제8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이력이 있다.

이것이 저자 개인의 일탈로 끝낼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논문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가톨릭대학교, 한국연구재단, 철학연구회가 온갖 항의에 불구하고 모로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학문 기관 세 곳이 이처럼 찌라시만도 못한 논문을 감싼다면, 자정작용이 전무한 어용조직이라는 이미지를 벗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일부 조직의 타락에 대해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논파하는 과정에서 제2의 인문학 열풍이 일어날지, 아니면 인문학 일반에 대한 혐오 또는 무관심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더 지켜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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