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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리처드 로티 - 상대주의: 찾기와 만들기(1996)


본 내용은 Richard Rorty의 『Philosophy and Social Hope』에 수록된 에세이인 『Relativism: Finding and Making』의 번역문입니다. 원문은 https://cdclv.unlv.edu/pragmatism/rorty_intro_hope.pdf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진리는 다양한 감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라는 니체의 말에 동조하는 철학자들은 ‘상대주의자’라는 멸칭을 듣는다. “진리는 믿음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윌리엄 제임스에게 동조하는 자들과, 과학이 자연 그대로의 세상을 점점 더 정확히 설명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토머스 쿤에게 동조하는 자들도 같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식 전통에 반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그 외의 것들(특히 인간적 욕구 및 관심) 사이의 연관성을 구분하지 않는 철학자들은 ‘상대주의자’라고 불린다.

나처럼 이러한 분류법을 삼가는 철학자들은 탄탄한 준거를 찾아서 덧없는 욕구 및 관심,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한 덧없는 결과물을 판단하는 전통 철학관을 거부한다. 예컨대 우리는 윤리와 타산에 대한 칸트주의적 구분법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무조건적 · 횡문화적 도덕 의무라든가 몰역사적 인간본성에 기반한 의무 자체를 부정한다. 유럽 철학계의 포스트니체주의적 전통과 미국 철학계의 프래그머티즘적 전통 사이에는 이처럼 반플라톤적 및 반칸트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나는 철학자 중 존 듀이를 가장 존경하고, 추종한다. 듀이는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를 플라톤과 칸트의 멍에로부터 구원하려고 60년을 노력했던 사상가였다. 듀이는 종종 상대주의자라고 폄하되어 왔고, 나 역시 그러한 폄하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스스로를 상대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을 반동 성향과 엮어서 ‘반플라톤주의자’, ‘반형의상학주의자’ 또는 ‘반정초주의자’라고 소개한다. 반대로 우리의 비판자들은 보통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 ‘형의상학주의자’ 또는 ‘정초주의자’라고 표현하는 대신, 상식 또는 논리 옹호론자라고 표현한다.

당연히 양측 당사자들은 각자 선호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논쟁에 임한다. 플라톤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역시나 상대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은 사람도 없다. ‘상대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우리는 당연히 이성과 상식의 적으로 지칭되는 게 달갑지 않다. 우리는 그저 구식이 된 철학 도그마를 비판하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자가 상식으로 여기는 게 바로 그 도그마다. 우리와 비판자들은 예컨대 ‘진리는 실재에 내재된 특성에 대응한다’는 구호가 상식을 표현하는지, 아니면 그냥 다소 철 지난 플라톤주의적 특수 용어인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지지부진하게 토론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해당 구호가 철학에서 마땅히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느냐, 아니면 여러 가지로 제시된 철학적 관점 중 한 가지에 불과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과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진리대응론이 너무 명백하고, 그 자체로 증명이기에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이나 의문을 갖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이론이 이해되기가 매우 어렵고, 특별한 중요성을 갖지 않음에도 몇 세기 동안 비판 없이 애용된 구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구호를 멈춰도 별다른 피해가 없을 거라는 게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의 생각이다.

우리는 소위 ‘상대주의자’라 불리며 상식적으로 발견물로 여기는 것 상당수를 발명품으로 몰아가는 사람처럼 여겨지고 있기에 다소 난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의 비판자들은 과학적〮윤리적 사실들이 대강 어딘가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로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를 비판하는 플라톤주의자 또는 칸트주의자들은 ‘상대주의자’라는 호칭에 싫증이 날 때마다 우리를 ‘주관주의자’ 또는 ‘사회적 구성주의자’로 바꿔 부른다. 그들이 이해하기로 우리는 외부에서 인식한 어떤 것이 사실은 자아 내부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기존에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사실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줄 안다.

하지만 나 같은 반플라톤주의자들은 그런 식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우리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우리가 만듦과 찾음의 구분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의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이 괴상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게 사실 주관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발명한 것인가?’ 우리가 발견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한다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반면 발명했다고 말한다면 엉뚱한 말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발명품이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 것인가? 진리가 요긴한 허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맞다는 주장의 진위성 여부는 어떻게 가릴 것인가? 픽션이기에 너무 요긴한가? 어떤 점에 대해서 요긴한가? 누구에게 요긴한가?

나는 상대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우리가 더이상 찾기-만들기, 발견-발명, 객관-주관 사이의 구분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관주의자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에게 ‘사회 구성주의자’라는 다소 진실과 동떨어진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바깥의 것과 우리 안의 것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어떤 이론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거부해야 하며, 그 어휘가 우리에게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어휘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즉 플라톤주의와 형이상학을 기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라 하면 하이데거가 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한 넓은 의미의 형이상학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도 서양 철학이 모두 플라톤의 주석이라며 이 같은 논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플라톤식 구분법을 중심으로 다룰 때에 한해서 ‘철학적’이라고 불린다는 것이었다.)

발견된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또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배제한 그 자체의 것’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구분의 변형에 다름 아니다. 지난 몇 백년 간 이루어진 이러한 구분은 데리다의 ‘놀이의 지평을 벗어난 순수 현전’ 개념, 즉 상대성의 지평을 벗어난 절대자를 찾는 ‘현전의 형이상학’ 개념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형이상학을 버리려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구분을 단념해야 한다. 나 같은 반플라톤주의자들은 ‘상대주의자’라는 명칭을 받아들일지를 따지기에 앞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물려받은 어휘의 유용성과 관련하여 한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해당 어휘를 폐기한다면 합리성을 폐기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으로 합리적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상대적인 것, 발견된 것-만들어진 것, 객관-주관, 본성-관습, 실재-외양의 구분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그게 정말 합리적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비합리적인 게 맞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그런 의미로 비합리주의자가 된다 한들 논쟁을 이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일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비합리적이라지만 입에 거품을 물거나 동물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냥 특정 방식, 즉 플라톤 방식의 대화를 거부할 뿐이다. 우리가 플라톤식 개념을 차용해서는 우리의 관점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손쉽게 고전적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 새로운 개념을 개발해서 꾸준히 점진적으로 상대를 설득시킬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하자면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우리가 거부하는 구분법이 그대로 전제된 ‘상대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굳이 우리 자신을 표현하자면 반(反)이원론자라는 명칭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질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데리다의 ‘이원적 대립’에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을 좋은 ‘X’와 나쁜 ‘X 아닌 것’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의 탐구 방식에 있어 언제나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구분법, 즉 플라톤식 구분법에 반대한다. 우리는 해당 구분법이 서구적 상식에 스며든 점은 인정하나 그것만으로 상식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여기까지가 ‘소위 상대주의자인 우리’와 ‘반플라톤주의자인 우리’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우리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해당 명칭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도입부에서 밝혔듯 내가 염두하고 있는 프래그머티즘 전통에 기여한 철학에는 니체 이후의 유럽 철학 전통과 다윈 이후의 미국 철학 전통이 포함된다. 전자와 관련된 석학으로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가다머, 데리다, 푸코가 있다. 후자와 관련된 석학으로는 제임스, 듀이, 쿤, 콰인, 퍼트남, 데이빗슨이 있다. 이들 철학자는 모두 상대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린 전력이 있다.

양쪽 전통 모두 칸트식 및 헤겔식 주관-객관 구분법, 칸트 및 헤겔의 질문을 유도한 데카르트식 구분법, 데카르트 사상의 틀을 마련한 그리스식 구분법에 대해 회의론을 시도한 바 있다. 양쪽 전통을 상호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것, 즉 이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그리스식 구분법에 대해 갖는 회의감이다. 이러한 구분법은 ‘발견된 것이냐, 만들어진 것이냐?’,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 ‘실제냐, 외양이냐?’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을 넘어 아예 거의 불가피하게 만든다.

나는 양쪽 전통이 어떻게 묶이는지 더 설명하기에 앞서서, 일단 둘이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다. 니체와 맑스에게서 보듯 유럽 철학자들은 다윈의 혜택을 많이 입었음에도 대체로 실증주의 과학자들이 하는 일과 철학자들이 하는 일을 꽤 엄격히 구분했다. 전통 유럽 철학자들은 때때로 ‘자연주의’, ‘경험주의’, ‘환원주의’를 비웃는다. 어떨 때 그들은 최근의 영미권 철학이 그 질병에 물들었다며 제대로 심의하지도 않고 저평가한다.

이에 반해 미국 프래그머티즘 전통은 철학, 과학, 정치의 경계를 허무는 단계에 이르렀다. 해당 전통의 대변인들은 횐원주의 또는 실증주의를 부정함에도 종종 스스로를 ‘자연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영국의 실증주의 전통 및 빈 학파의 과학 환원주의적 성향 모두에 대해 충분히 자연주의적이지 않다고 거부감을 표시한다. 내 말이 쇼비니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일관성 면에서 앞서 왔다. 이는 ‘철학’이라는 특이적, 자율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관념이 그것을 지배해 왔던 용어가 시험에 부쳐질 때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이전부터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플라톤주의적 이원론이 걷히면 철학과 철학이 아닌 나머지 문화를 가르던 경계선은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양 쪽 전통의 차이를 달리 제시하자면, 유럽인들은 통상적으로 특이하고 참신한 포스트 니체주의적 ‘방법’을 철학적 ‘방법’으로 제시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 하이데거 및 초기 사르트르 철학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논의를, 후기 하이데거에게서 ‘사유’라는 이름의 신비하고 경이로운 어떤 것을, 가다머에게서 ‘해석학’을, 푸코에게서 ‘지식의 고고학’ 및 ‘계보학’을 발견한다. 이러한 학풍을 타지 않는 사람은 데리다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참신한 철학적 방법 또는 전략을 발견했다고 진지하게 발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엉뚱한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라마톨로지’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반면 미국인들은 발표에 큰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물론 듀이가 ‘과학적 방법’을 철학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꺼낸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가 그 방법의 실체는 물론이고 그것이 호기심, 열린 마음, 열린 대화의 미덕에 어떻게 보탬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점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가 없다. 제임스는 가끔 ‘프래그머티즘적 방법’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는 반플라톤주의적 질문, 즉 ‘우리가 인위적으로 변화된 이론을 정립하면 실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독려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독려 자체는 프래그머티즘적 방법의 활용이라기보다는, 전통적 철학 문제 및 용어에 회의적 태도를 취한 것에 더 가깝다. 콰인, 퍼트남, 데이빗슨은 모두 ‘분석 철학자’로 불리지만, 이 셋 중 스스로가 ‘개념적 분석’이라는 방법 또는 기타 다른 방법을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당 철학자 세 명이 탄생에 기여했던 소위 ‘포스트 실증주의적’ 분석 철학은 방법의 우상화 문제에서 자유롭다.

동시대에 프래그머티즘적 전통에 기여한 사람들 다수는 전반적으로 문화 내에서 철학이 차지하는 특이성 또는 탁월한 위치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 누구도 철학자가 물리학자나 정치가의 사고와 뚜렷이 구분되는 생각을 한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과학이 정치처럼 문제 해결 지향적이라는 토머스 쿤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본인에게 철학적 문제를 해결할 역할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해결하고 싶은 주요 문제는 바로 우리가 당면한 철학적 문제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묻는다.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철학 문제는 왜 흥미로운 동시에 성과가 없는 것일까? 키케로의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이 결론이 안 나는 토론을 하고, 늘 우려먹던 변증법적 순환논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음에도 가르침을 받겠다는 제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 즉 그리스인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 우리에게 던진 문제가 어떤 성격을 갖는지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앞서 말한 발견과 만들기의 구분에 대한 질문으로 데려다 준다. 철학 전통에서는 사유하는 자들이 문제를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한다고 본다. 프래그머티즘 전통에서는 문제가 자연적이라기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며, 철학 전통에서 사용된 것과 다른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변질되기도 한다고 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이와 같은 발견-만들기, 자연-인공의 구분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프래그머티즘 학자들로서는 간단히 서구 철학에 전통적으로 등장하던 문제들을 설명하면서 사용된 용어들이 한때는 유용했지만, 현대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더 편할 것이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전통 철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해 다루었던 반면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발견된 것과 만들어진 것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실재와 외양의 구분을 지양한다. 우리는 실재와 외양의 구분 대신 유용한 것과 덜 유용한 것의 구분을 지향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학의 용어들(하이데거가 ‘존재론 및 신학적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용된 용어들)이 조상들의 목적에 유용했을지 몰라도,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용어는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조상들이 타고 올라왔던 사다리를 걷어차야 하는 입장이다. 이는 우리가 안주할 최종 장소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을 괴롭혔던 것과 다른 문제들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걷어찬다는 뜻이다.

이상으로 나는 프래그머티즘 학자가 반대자를 대할 때의 태도, 그리고 반대자와 논쟁을 불러일으킬 용어의 사용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개관했다. 이제부터는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이 인간적 탐구에 대해서 실재의 본성에 대응하기 위한 시도라는 정의를 포기하고, 덧없는 목적에 덧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정의할 때 어떤 시각이 형성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우리를 결박’하는 그림, 즉 실재를 자기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데카르트주의-로크주의적 그림과 결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며, 인간이 최선을 다해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 즉 최선을 다해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도구를 개발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이 똑똑한 동물이 개발한 도구 중에는 언어가 포함된다.

우리가 실재 바깥에서 도구를 얻어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 도구가 망치가 됐건, 권총이 됐건, 믿음이 됐건, 주장이 됐건 도구 사용은 주변환경과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어 사용을 환경에 내재된 본질을 표상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환경을 다루기 위한 도구 사용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실재에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질문, 즉 인식론적 회의론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한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보다 실재에 더 가까이 맞닿아 있을 수는 없다. ‘실재에서 벗어난다’는 개념은 그 자체로 우리가 몸에 가해지는 인과 작용에서 자유롭다는 관점, 즉 비(非)다윈주의적이면서 친(親)데카르트주의적인 관점을 상정한다. 데카르트주의자는 우리가 독립체로서 우주와 인과적 관계보다는 표상적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의 사유에서 데카르트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다윈주의를 완벽히 채택하려면, 언어를 표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인과적 관계망 속에서 유기체를 환경과 묶는 교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언어 그리고 탐구 정신을 (최근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같은 학자들의 저작들로 인해 널리 퍼진 바 있는) 생물결정론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인간성 내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여기는 습관을 버릴 수 있게 된다. 미국의 두뇌 철학자 다니엘 데넷이 말했듯 데카르트적 무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의식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거창한 철학적 문제 또는 과학적 문제가 실존한다는 믿음도 버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성인의 인체가 벌이는 행동이 너무 복잡해서 믿음과 욕망 따위의 의도로만 설명 및 예측될 수 있다는 주장을 버려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믿음과 욕망은 언어로 표현될 수도,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언어 이전의 의식이 아니다. 이들이 비물질적인 과정인 것도 아니다. 거창한 철학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은 ‘판결적 태도’에 해당한다. 즉, 인체나 컴퓨터의 기질 중 몇 가지 판단을 내리거나 거부하는 기질에 해당한다.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개, 신생아, 온도조절장치와 같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욕망을 갖는 주체의 존재 여부를 형이상학으로 일축하기 마련이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이러한 생물학적 접근에 덧붙여 찰스 샌더스 퍼스의 말을 인용하며 믿음이 습관적 행동의 결과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대로라면 누군가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내가 특정 판단의 진실을 입증할 의지가 있을 때 나오는 행동대로 그 누군가가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돌이나 식물이 아니라 판단을 사용하는 또는 사용한다고 상상되는 대상이 믿음을 갖는다고 간주한다. 이는 전자가 후자에게 있는 특정 기관이나 능력, 즉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돌이나 식물의 습성이 굳이 판단적 행동을 상정하지 않고도 행동의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익숙하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배고프다’와 같은 말을 할 때 마음 속에 있던 판단을 외부로 꺼내는 게 아니라, 단순히 주변인으로 하여금 우리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데카르트적 무대, 즉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는 데 쓰이지 않는다. 말은 그저 우리의 행동을 타인의 그것과 조화시키기 위해 쓰인다. 물론 그렇다고 믿음이나 욕망과 같은 심리 상태를 생리학적 상태 또는 행동 상태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믿음이 정신적 측면에서건 물리적 측면에서건 실재를 정확히 나타내는지 질문해 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이 보기에 해당 질문은 나쁠 뿐만 아니라 철학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목적에 부합’할지를 묻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는 ‘그 프로그램을 내 컴퓨터에서 구동하는 게 어떤 목적에 부합’한지를 묻는 것과 같다. 나는 퍼트남식 관점을 빌려서 인간의 몸이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고, 인간의 믿음 및 욕망이 소프트웨어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누구도 자기 컴퓨터에 설치된 소프트웨어가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지는 알 수도 없을 뿐더러 관심도 갖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소프트웨어가 특정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할지 여부에만 관심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우리 믿음이 실재를 반영하는지, 아니면 외양에 불과한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 믿음이 욕망에 만족을 주는 최선의 습관인지 여부에 관심을 갖는다.

즉, 우리가 아는 한에서 한 믿음이 진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아는 한에서 더 나은 행동 방식이 반영된 다른 믿음은 없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태양이 지구 주위로 돈다는 우리 조상의 믿음이 틀렸고, 지구가 태양 주위로 돈다는 우리 믿음이 옳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조상보다 더 우수한 도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현대인의 도구가 아닌 자신들의 도구가 그리스도교 성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더 유용하다고 반박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원칙으로 인한 이점보다 현대 천문학과 우주 여행으로 인한 이점이 더 크다고 재반박할 수 있다. 우리와 중세시대 조상 중 누가 우주를 더 올바르게 통찰했는지를 따져서는 답이 안 나온다. 하지만 천체 운동에 대한 어떤 관점이 어떤 목적에 유용하게 쓰이고 부합하는지에 대해 주목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쪽의 목적이 성서의 증명이라면, 다른 한 쪽의 목적은 우주 여행이다.

상기 내용에 대해 부언하자면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진리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진리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인류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어떤 합의, 그리고 공통된 목표 및 관련 수단에 대한 합의이다. 행동의 체계화에 이를 수 없는 탐구 활동은 말장난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물체의 미세구조, 또는 정부 분립에 따른 올바른 권력 균형 관계와 관련한 어떤 이론을 마련할 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기술 또는 정치 분야에서 진보를 이룩하려면 우리 수중의 어떤 도구를 사용해야 할지를 논한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에게 있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회과학과 정치학, 정치학과 철학과 문학을 가르는 뚜렷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삶의 개선에 힘쓰지 않는 영역은 없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에 따르면 이론과 실천의 뚜렷한 경계는 없다. 왜냐하면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말장난에 해당하지 않는 한 이미 모두 실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표상이 아닌 행동 양식이라고 말할 때, 언어를 표상이 아닌 도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발견과 발명, 또는 만들기와 찾기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 유기체와 주변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매우 무의미하다. 예를 하나 들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은행 계좌에 대해서 자연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발명품이라 칭하는 반면, 기린에 대해서 사회적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사물이라고 칭한다. 은행 계좌는 만들어진 것이고, 기린은 발견된 것이다. 이 말은 곧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기린은 존재했겠지만 은행 계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기린이 인간의 영향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해서 이들이 인간의 요구 그리고 관심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요구 및 관심사에 의거하여 기린을 묘사한다. 우리의 언어에 ‘기린’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럴 만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리가 기린을 구성하는 ‘장기, ‘세포’, ‘원자’ 등등의 단어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사물에 실천하는 묘사는 늘 우리의 목적을 반영한다. 혹자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자연 사물을 고기 부위를 자르듯 종류별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나와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이를 어불성설로 일축한다. 기린과 주변 환경 간의 경계는 수렵 생활하는 인간에게나 분명히 보일 뿐이다. 만일 언어를 사용하는 개미나 아메바나 멀리서 지구를 지켜보는 우주 탐험가가 존재한다면 그들 입장에서 그 경계는 한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고, 언어에 ‘기린’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똑 부러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기린이라고 호칭되는 사물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묘사할 방법이 수백만 가지가 된다고 할 때, 그 어느 묘사가 다른 묘사보다 사물 자체에 더 근접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다. 기린이 원자의 모음이냐, 인체 감각기관의 다양한 실제적 또는 잠재적 감각 작용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이냐, 아니면 그게 아닌 다른 것이냐의 질문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듯, ‘우리가 진정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가?’ 또한 구태여 던질 필요가 없는 질문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저 대립하는 묘사 중 어느 것이 우리의 목적에 유용하게 부합하는지만 알면 된다.

지식이 표상이라는 점에 반대하는 프래그머티즘 학자는 목적 묘사의 상대성을 주요 논점으로 삼는다. 우리의 탐구 활동은 사물 자체의 정학한 설명이 아니라 실용성에 맞춰져 있다. 우리가 갖는 믿음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특정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는 주변 사물의 복사가 아닌 취급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므로 ‘우리 지식에 대한 객관성의 기여도’와 ‘우리 지식에 대한 주관의 기여도’를 가를 방법은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아닌 언어로 특정 판단을 긍정하고자 하는 의지는 모두 인간 유기체와 그 나머지 우주와의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인과적 연결 관계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다. 이처럼 그물망과 같은 인과적 연결 관계를 쪼개서 특정 믿음 속에 함유된 주관성과 객관성의 비율을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언어와 사물 사이의 어떤 것을 찾기가 불가능하듯, 기린 그 자체를 기린을 말하는 우리의 방식으로부터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현시대의 손꼽히는 프래그머티즘 학자인 힐러리 퍼트넘은 “애초에 우리가 ‘언어’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요소들은 우리 현실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게서 ‘언어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에 대한 ‘지도제작자’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말을 남겼다.

완벽한 지식을 향한 플라톤주의적 꿈이란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것 모두를 청산하고,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밖에 있는 것에 자아를 맡기는 꿈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생물학적인 입장을 취한 이상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다. 플라톤주의자가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 어떠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도 여타 학문과 연결되지 않는 인식론을 가져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여타 학문과 척을 지는 지식이나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은 일종의 기적과 같이 초자연적인 어떤 것에 종속될 것이다.

우리는 말, 행동, 믿음 모두가 인간 욕구와 관심사의 충족에 결부된다는 주장함으로써 세속적 계몽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초자연적인 진리의 인도와 빛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주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계몽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인 인도가 존재한다는 사상을 버리고, ‘이성’이라 불리는 유사 신성 능력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채택했다. 하지만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학자들 및 포스트니체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게 바로 이 사상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 중 자연과학이 실재의 표상보다 실재의 취급을 시도하는 학문이라는 주장은 파격적인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 이보다 파격적인 주장으로는, 도덕적 선택이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의 양극단 사이의 선택이라기보다, 서로 상충하는 여러 이득 사이의 타협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식에 대한 정초주의자와 반정초주의자 사이의 논란은 철학 교수들에게나 맡겨도 인생에 차질이 없을 학구적 논란에 불과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덕적 선택의 성질에 대한 논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악 사이보다 여러 차선들 사이에서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철학 교수에게서 절대적인 올바르지 않음과 올바름이란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상대주의라는 것에 대해 흥미가 갈 것이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 또는 니체주의자들과 그 반대자들의 싸움은 철학 교수들만 알고 있기에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보다 다양한 사람이 싸움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실정이다.

나 같은 철학자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알았을지 불분명한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공격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젊은이들이 절대 도덕과 객관적 진리에 대해 배우지 못한 채 자란다면 장래의 문명에 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해당 잡지사와 신문사는 흔들림 없는 도덕 원칙에 대한 애착을 뒷세대가 물려받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향한 투쟁에 맥이 끊길 것이라 말한다. 교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우리는 이러한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마치 인류의 미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몰리는 기분이 든다. 그들은 세대 하나가 통째로 니체 및 듀이 특유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면, 앞서 수백 년 동안 이룩한 도덕적 진보가 전복돼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듀이와 니체의 사상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듀이가 사회민주주의 유토피아에서 행복한 삶을 이룩할 사람들을 그렸다면, 니체는 그런 사람들을 위대함에 다가가지 못할 쓸모없는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으로 보았다. 정치적으로 듀이가 뼛속 깊이 민주주의자였던 반면, 니체는 뼛속 깊이 반민주주의자였다. 한편 두 사람은 지식의 속성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듀이는 모든 악이 거부된 선이라고 말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모든 인간 욕구는 될 수 있는 한 당장 채워져야 하며, 그것을 거부할 때는 다른 인간 욕구와 충돌할 때뿐이라고 말했다. 니체라면 이에 완전히 동의했을 것이다. 그라면 힘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 간의 경쟁으로 이 개념을 설명했겠지만, 제임스와 듀이라면 다소 사디스트적인 뉘앙스가 담긴 ‘힘’이라는 개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 철학자들은 계몽주의, 그리고 특히 도덕적 원칙이 ‘이성’이라는 특수 기능에 의해 생산된다는 칸트주의를 같은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해당 사상을 세속에 신적인 존재의 생명력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시도로 바라보았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타협하지 않을 엄격한 신처럼 뭔가 절대적인 존재가 없다면 악에 저항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악이 차선에 불과하고, 도덕적 선택 모두가 서로 상충하는 이득 사이의 타협이라면 양심의 갈등도 있을 이유가 없으며, 불의에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린 셈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양심의 갈등은 생존 투쟁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며, 경솔함과 불의 사이, 그리고 악과 부적절 사이를 칼 같이 가르는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을 해소하고, 인간의 평등성을 신장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행복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늘려 주는 방안에 관심이 많다. 이런 목표는 우주에 적혀 있는 게 아니며, 신적 의지의 표현이 아니듯 칸트의 ‘순수실천이성’의 표현도 아니다. 이러한 목표에 목숨을 던질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초자연적 힘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은 반대자들이 말하는 ‘불변의 도덕 원칙’이라는 단어가 과거 전통을 압축하고,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습관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밀의 최대 행복의 원리와 칸트의 정언명령은 사회의 특정 관습, 특히 평등주의를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와 관련된 이론만큼은 갖췄던 그리스도교적 서구 사회의 특정 관습을 상기하려는 시도에서 주장되었다. 밀과 칸트의 비종교적인 주장, 즉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할 때 또는 상대를 나 자신처럼 생각하여 내가 바라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으로 여길 때 혈연, 성, 인종, 신앙교리 등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에 종교를 가미하면 하나의 생물종 모두를 형제 자매로 묶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산출된다.

평등주의로 요약되는 도덕 원칙 못지않게 뿌리 깊은 도덕 원칙은 그 밖에 더 있다. 그 중 하나로 여성의 명예가 더럽혀졌을 때 가족이 피로 갚아 줘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동성애자 아들을 두느니 차라리 아들이 없는 게 낫겠다고 여기는 원칙도 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원칙들로 생겨난 유혈 충돌과 동성애 탄압을 없어져야 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해당 원칙을 ‘통찰’이라기보다는 ‘편견’의 결과로 간주한다. 밀과 칸트의 원칙처럼 우리가 인정하는 원칙이 ‘이성적’인 반면, 핏빛 복수극과 동성애 탄압을 양산하는 원칙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을 주는 철학자만큼 근사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인정하는 원칙이 더 이성적이라는 말은 곧 그것이 더욱 전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편적 적용이 적용되려면 한 쪽 가문의 여성과 다른 쪽 가문의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경계가 다소 허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특정 집단의 정확한 구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성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보기가 힘들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말라’는 원칙을 떠올려 보자. 해당 원칙이 보편적이라는 점은 의심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국가를 지키는 군인, 살인을 방지하려는 자, 국가 소속의 처형집행인, 편안한 안락사를 돕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살인하지 말라’는 말만큼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딱히 이성적인지 여부를 알 수 없으므로, 이 분야에서 ‘이성적’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논란이 많은 행위를 저지르고 나서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원칙을 적용하여 변론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러한 원칙에 기대를 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모든 조건을 고려했을 때 최선인 줄 알았다”는 말밖에 못할 상황도 있는 법이다. 보편적으로 들리면서 내 행동을 뚝딱 정당화시켜 주리라 기대되는 원칙보다 후자의 변명이 덜 이성적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히기 어렵다. 인구 억제, 의료서비스 제한 등등에 얽힌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겠다고 관련 원칙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가 듣기로 올바른 행동의 배후에 반드시 합리적인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은 곧 우리가 우주적, 초자연적 법정과 같은 곳에 서 있다는 주장과 같다. 우리는 폭군이나 군중의 변덕보다 법으로 운영되는 사회가 최선의 사회임을 인지한다. 흔히들 법이 없으면 사람의 인생은 감정과 폭력에 좌우된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서 법을 관장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이성 법정이 우리 자신을 결정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칸트가 도덕 의무를 이해한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인간에 대한 칸트주의적 묘사로는 역사학 또는 생물학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두 학문을 살펴보면 사회는 법이 아닌 사람에 의해 통치되며, 사회 발전은 천천히, 뒤늦게, 아슬아슬하게, 우연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듀이는 칸트에 반대하는 동시에, 보편적 도덕 원칙이 특정 사회의 역사적 전개로부터 파생한 한에서만 유용하다고 주장했던 헤겔에게 동조했다. 그런 사회는 원칙 없이 빈 껍질에 불과했을 부분을 제도로 충당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정의의 영역들』(Spheres of Justice, 1983)이라는 저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도 최근 헤겔과 듀이의 변론에 나서고 있다. 그는 비교적 신작인 『두꺼움과 얇음』(Thick and Thin, 1994)에서 특정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를 보편적 도덕순리 또는 횡문화적 도덕법칙이라는 공통된 중핵에 우연히 부착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그는 오히려 관습과 제도라는 두꺼운 뭉치가 가장 먼저 형성되어서 도덕적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두꺼운 도덕(한 지역에 특수적으로 형성된 도덕 — 옮긴이)을 골고루 모아서 얇은 도덕(외부공동체에도 통용되는 도덕 — 옮긴이)을 얻어낼 수는 있어도, 소위 인류 보편적 ‘이성’이라는 능력을 바탕으로 계율을 얻어낼 수는 없다. 생물종 여럿끼리 서로 비슷한 적응 기관을 갖춘 게 우연이듯, 두꺼운 도덕 여럿끼리 서로 비슷한 면이 존재하는 것도 우연이다.

헤겔, 듀이, 왈저처럼 반칸트주의적 입장을 취한 사람이라면 자기 공동체의 두꺼운 도덕을 옹호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 본인이 취하는 도덕관의 합리성을 제시하면서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본인의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갖는 뚜렷한 장점 여러 가지를 제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두꺼운 도덕들 사이의 상대적 장점 여부는, 내가 좋아하는 책 또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책 또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한 여부와 마찬가지로 결론이 안 나는 문제다.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가 보기에 진실이 보편적으로 ‘이성’이나 ‘인간 본성’에서 나온다는 사상은 그저 결론이 미리 정해진 토론 끝에 나온 사상에 불과하다. 나는 인류 전체가 글로벌 사회, 즉 유럽형 산업민주주의 특유의 두꺼운 도덕이 다분한 사회에서 함께 뭉칠 것이라는 공통된 희망을 표현하기에는 해당 사상이 부적절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해당 사상은 그러한 공동체에 대한 염원이 인간이라는 생물종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가 보기에 그러한 제안은 아나콘다가 되고 싶은 염원이 파충류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거나, 또는 유인원이 되고 싶은 염원이 포유류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제안과 대동소이하다. 나 같은 프래그머티즘 학자들이 우리에 대해 내려진 상대주의자라는 혐의에 대해서, 그저 비판자 본인들이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운이라고 주장하기에 내려진 혐의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대규모 군벌에 의한 홀로코스트나 민주주의 정부 타도를 인류의 운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국제연합헌장과 헬싱키 선언에서 상정된 유토피아적 세계를 인류의 운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 미래에 전자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면 인류가 불운한 일에 처한 것은 분명하나, 비이성적인 일에 처한 것은 아니거니와, 도덕적 의무에 부응하지 못한 일에 처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행복의 기회를 잃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즉, 나는 어떻게 해야 비판자 입장에서 ‘상대주의적’이고, 내 입장에서 ‘반정초주의적’ 또는 ‘반이원론적’인 나의 관점에 대해 결정적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히 내 편이 다윈주의에 호소하면서 상대편에게 어떻게 해야 초자연에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답이 나오기는커녕 질문만 늘어날 것이다. 상대편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관찰이 인간에게서 존엄성과 자존심을 빼앗는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 편으로부터 질문이 늘어나는 점은 변함이 없다. 아무래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주제로 자기 주장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둘 중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일 듯하다. 인류 및 사회를 우연의 산물로 보는 세력과 목적이 내재된 존재라고 보는 세력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평가마저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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