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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책으로만 만났던 교수님을 현실에서 만났을 때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책이 한 권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정말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었기에 화장실, 일터, 지하철에 들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나무 사이만을 돌아다닐 뿐 숲을 한 눈에 집어넣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나와 인연이 아닌 듯했다. 결국 나는 패배의 쓴맛을 톡톡히 본 채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야 했다.

대체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해력이었다. 이해력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열정을 더 쏟아 부었어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쏟아 부어야 했을까? 돈을 써야 했다. 책에 좀처럼 돈을 쓰지 않는 내 어설픈 학구열 때문에 그 책과 나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형성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에는 없지만 인터넷 서점에는 있는 해설서를 주문했다.

해설서는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족집게처럼 집어서 설명했다. 흩어져 있던 나무들이 내 눈 앞에 모여 하나의 숲이 되었다. 해설서의 저자는 누구길래 이 어려운 내용을 간결한 문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작가의 말>도 정독했다.

그 저자의 책을 두 권 더 읽었고,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친구에게 그 분에 대해 극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그 분의 무료 강연을 알아봐 주었다. 장소는 서대문구의 한 도서관 강연실이었다.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새로 낸 후 홍보 차원에서 좋은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았고, 강의실 맨 뒤에는 교수님의 신간 서적 여러 권이 판매용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뵙는 교수님은 체격이 말랐고 어깨가 좁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미국의 핸썸 배우 채닝 테이텀보다 교수님이 더 멋있어 보였다. 교수님의 말 솜씨는 글 솜씨와 정확히 일치했다. 막힘 없는 일련의 말씀들이 내 머리가 아닌 가슴 속으로 입력되었다.

나중에 "자, 질문 있으신 분"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손을 들 수 없었다. 이미 한시간 남짓한 강연 내내 나의 호기심이 생겨날 구멍을 명쾌하게 채워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뒤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서 질문을 하기는 했다.

교수님의 화려한 언변은 그 때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아니, 아예 말문이 막히셨다. 질문자가 강연의 내용과 관련 없이 본인의 아들 자랑만 하고 나서 입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드셨을지는 배움이 미천한 나로서 알 길이 없다. 준비해 온 물건들을 정리할 때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났다.

나는 책에 돈을 아끼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기에 교수님이 들고 온 책을 사지 않았다. 내가 팬심을 드러내든 말든 교수님의 눈에는 내가 그저 책을 사지 않은 1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숲 속 나무를 한 곳으로 묶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이후로 교수님이 몇 권의 책을 더 썼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부터가 책에 관심이 멀어졌기에 알아 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아는 최근 소식이라고는 여행 칼럼니스트가 되었다는 소식뿐이다. 신문사에 기고하는 칼럼들이라 인터넷에서 얼마든 읽어 볼 수 있다.

내용은 그냥 본인 분야와 관련없는 순수 여행 얘기뿐이다. 관광 명소 하나를 통째로 넘겨도 결코 살 수 없을 학식을 갖춘 분께서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부모들이 딱 좋아할 만한 관광지 여행 소감이나 써 왔던 것이었다.

양질의 해설서를 만들어내는 그 마이더스의 손이 여행 블로그 게시물과 다름없는 글에 낭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그 글들이 사실은 대단한 것들인데 내가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위에서 말했든 배움이 미천하기 때문에 교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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