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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종교는 정말로 인민의 아편일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맑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 말은 많이 들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맑스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하나, 종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1. 종교는 건전한 판단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2.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도피와 향락으로 물들인다.


1999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부모의 그릇된 신앙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아이(당시 9세)의 몸 속에는 무게 5kg에 달하는 종양이 임산부 태아처럼 자라나 있었지만 부모는 기도로 해결하겠다며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해당 에피소드 방영 이후로도 3 년 동안 고통 속을 헤매다 결국 숨을 거두었다.


아이의 부모는 정말로 종교라는 아편에 취해 아이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다. 교회 목사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면 일반 신도에 비할 데 없을 목사가 세속 병원행을 강력권고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건 목사가 부모에 비해 신앙의 영역과 인간사의 영역을 균형감 있게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도 여려 군데 다녀 보았다.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세상 만사를 신에게 떠넘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신앙이라는 하이패스만 있으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천국 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무고한 사람들을 이단심문하고 고문하던 시절의 교회와 현대의 교회를 같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단절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니즈에 맞추어 생존 및 발전해 왔다.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 종교인들은 뒤떨어진 지식을 가진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과학이 반드시 종교보다 한 발 앞서서 진리에 근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 과학에는 진보가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그걸 엄밀히 판가름할 기준이 없다고 한다. 과학의 발전처럼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지식 모델을 교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나 종교 모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식 모델에 속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애초에 과학과 종교는 '세상은 왜?'라는 출발점을 공유한다. 둘은 가설을 실험으로 증명하느냐, 믿음의 영역으로 남기느냐에 따라서 서로 갈라진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 대부분은 이 갈림길이 넓은 Y자 형이라 믿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종교와 과학은 그렇게 간단히 구별되지 않는다. 갈림길은 좁은 U자 형으로 나 있으며, 심지어 그 갈림길이 생긴 사건도 인류사 통틀어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두 영역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알고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과학자들 중에도 종교인들이 꽤 있다. 그들이 종교로부터 영영 이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공백을 인정하는 것도 있겠지만, 종교가 심리적으로 여러 장점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할 의학생명 연구자들은 실험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


과학 못지 않게 엄격한 이성 판단이 요구되는 미국의 법정에서도 종교의 영향력은 여지없이 발견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성경책에 손을 얹은 채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서약합니다"라고 말하는 배우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 잔존한 종교적 영향력이 어디 이 뿐이랴? 가게를 쉬어 봐야 손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지역 소방관 영웅의 장례 행렬과 예배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처럼 언뜻 지식 발전이나 경제 성장에 무관해 보이는 종교 행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과학계, 법조계, 일반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아무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과연 그 사람들이 종교라는 아편에 취해서 업무와 무관한 행사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종교 행사에는 생명의 존엄성 및 양심을 일깨우는 기능이 명백히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위령제, 맹세, 장례식 등은 실리를 포기한 행사가 아니라 실리를 챙기는 행사이다!


우리는 로보트가 아니다. 실증적 판단만으로 불안과 피로 해소에 한계가 있는 존재고, 따라서 재정비의 재료를 실증 밖의 영역에서 구해야 하는 존재다. 종교에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제거하면 상징적인 존재를 여럿이 함께 기억하는 일련의 행위가 남고, 이는 공동체 지향적 생명체인 인간이라면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상관 없이 모두가 살면서 심리 안정화 차원에서 참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의 지식 활동은 모두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꽤나 종교적이다. 데카르트가 믿음의 영역이 아닌 지식을 탐구한 끝에 건진 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고, 이 마저도 결국 논파당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부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힌두교, 불교, 무한재석교를 안 믿는 무신론자들도 자기 만의 징크스, 타성적 신념, 특정 집단의 스테레오타입 등 실증 외적인 믿음 한 가지 쯤은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 또한 유신론자들 못지않게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지식 공백, 공동체 지향적 기질, 심리적 재충전, 실리적 명분 등의 이유 때문에 평생 종교를 품을 수밖에 없다. 종교가 건전한 판단을 가로막는 걸림돌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 안에 실증 외적인 요소, 즉 보기에 따라서 종교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가 사람의 마음을 도피와 향락으로 물들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람의 본성 자체가 종교적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다. 인간의 쌀, 밀가루, 배설물, 산소 등을 모두 포괄한 그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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