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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9. 2021

리처드 로티의 『트로츠키와 야생란』

*리처드 로티의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축약 번역했습니다.



8, 90년대 미국, 리처드 로티(1931-2007)는 우파와 좌파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다. 그를 두고 우파는 '젊은이들을 반지성주의로 내모는 허무주의자, 비합리주의자, 해체주의자, 냉소주의자'라 평가하고, 좌파는 '안일함에 빠져서 소수자의 인권을 저버린 속물, 엘리트주의자, 방관자, 금수저 옹호론자'라고 평가한다.


이 같은 비판이 쏟아진 것은 로티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두고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정치체제'라고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로티는 좌파의 입장에서 인종차별, 성차별,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감싸고 도는 인물이었고, 우파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혹자는 그가 그저 관심을 얻고 싶어서 상식과 대비되는 이상한 이론을 뱉어내고 있다고 폄하했다.


로티는 정통 철학에서 단골로 다루는 '객관적 가치'와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다. 하지만 그 역시 플라톤부터 차근차근 서양 철학사를 공부한 이력이 있었고, 여타 철학도처럼 가치와 진실을 현실에 적용하는 법을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이상한 관심병 환자라는 평가에 대해서 매우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집필하여 자신이 정통 철학으로부터 탈선하게 된 이유를 해명하게 되는데, 탈선 이전의 그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트로츠키'와 '야생란'이다.


로티는 트로츠키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가정에서 자랐다. 트로츠키 추종이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아버지가 ‘모스크바 재판에서 트로츠키에게 내려진 혐의에 대한 조사위원회’의 선전 홍보 책임자의 자격으로 멕시코 출장을 갈 정도였다. 게다가 트로츠키가 1940년에 암살당하자 그의 비서 중 한 명이었던 존 프랭크가 소련 비밀경찰들의 눈을 피해 은신하게 된 장소도 델라웨어 강변에 있는 로티의 가정집이었다.


주변의 어른들은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한 노동 착취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정작 그 어른들이 12살의 로티에게 급료도 주지 않고 노동 신문 배달하라고 시킨 게 함정) 로티는 사회주의가 곧 정직한 사라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득세한다면 놀이터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못된 급우들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한편 그는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취미를 파고 있었고, 또 그런 본인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이른바 힙스터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문제의 그 취미는 바로 야생란 탐구였다. 당시 그는 야생란의 라틴명, 서식지, 개화기 등을 종류별로 외우면서 그것들이 플로리스트 샵의 인공 재배 난초보다 순수하고 고결하다고 믿었다. 로티에게 있어 야생란은 트로츠키와 동급이었다.


하지만 로티는 맹목적 야생란 사랑에 대한 합리화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행여나 트로츠키가 살아 돌아와서 자신의 취미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어떨 것인가?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연결지을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질문을 해소하지 못한 로티는 15살에 시카고 대학의 허친스 칼리지로 진학했다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에서 “현실과 정의를 한 눈에 파악”하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현실’이 플랫브룩빌의 야생란 서식지라면 ‘정의’는 피착취자를 해방시켜 줄 트로츠키주의였다. 로티는 똑똑한 힙스터인 동시에 당당한 인도주의자이고 싶었다. 트로츠키주의가 나치즘 또는 파시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면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선한 이데아적 존재 또는 인간의 선한 본성부터 근거로 제시하는 게 합리적으로 보였다. 절대선은 또 신비하고, 찾기 힘들고,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알려졌다는 점에서 야생란과 유사하게 들렸다.


로티는 대학에서 플라톤 철학을 읽으면서 지행합일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플라톤의 철학은 선행과 박학 사이의 괴리를 일거에 해소했기에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언젠가 최고의 플라톤주의 철학자가 되어 야생란처럼 순수한 지혜와 선이 가득한 진리의 영역에 도달하겠다는 꿈을 품었고,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면 모두가 자신처럼 해당 영역을 지향하는 게 이치에 맞다고 여겼다.


로티는 5년의 기간 동안 플라톤 철학의 목표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명제를 확립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 혼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나 이를 해소하지 못했다. 두 가지 목표 모두가 매력적으로 들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서로가 연관 없어 보인다는 게 또다른 문제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반대 의견에 부딪힐 때마다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고서 탄탄한 근거로 재반박할  있을지 고민한다. 이에 해답을 구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자들이 내 놓은 ‘제1원칙’을 찾아보지만 각자가 서로 공존 불가능하다는 점만 발견하게 된다. 소위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 중 가설의 단계를 넘어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1원칙'들을 평가하려면 중립적 시각이 필요했고, 그런 것이 없다면 플라톤주의자들의 말대로 지성이 의지보다 우월하다고 믿을 근거도 부족해지는 셈이 되었다.


결국 로티는 접근법을 바꿔 철학적 진실을 제1원칙이 아니라 전체적 일관성에서 얻기로 한다.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은 곧 모순을 없애라는 것이다. “모순에 부딪히면 구별을 하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충고는 모순에 대한 게으른 해소법이다. 로티가 보기에 소위 철학적 재능이란 변증법적으로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가지를 많이 치는 능력에 불과했다. 이는 상대의 반박에 대한 논점 회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로티도 가지치기에 열중하던 때가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접근법에 회의감을 갖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40년 동안 로티는 철학의 장점을 한 마디로 표현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고 나서 철학이란 선배 철학자의 이론에 대한 ‘재서술’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철학이 시대를 규정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격언에 동의하기로 한다. 로티는 철학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이 추구할 법한 우주적 통찰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았다. 철학에 대해 그가 장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는 사회 관찰에 매우 유용하다는 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로티는 플라톤에 대한 환상에 깨져서 불멸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뒤에 스승들의 혹평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듀이를 찾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듀이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확실성과 영원성에 대한 논의를 피하는 동시에 다윈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범신론과 완전히 선을 그었고, 이는 로티에게 사상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후 그는 데리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를 읽었지만, 여전히 트로츠키와 야생란의 조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듀이와 화해하고, 반플라톤주의를 선언하고, 당대 분석철학의 동향을 고찰했음에도 애초에 30년 전에 대학에 진학하면서 품었던 질문에 대해서는 진도를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었다.


로티는 현실과 정의를 한 눈에 파악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을 인정했다. 플라톤을 타락하게 만든 게 바로 이런 시도였다. 무비판적인 신앙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플라톤과 같은 시도를 이룰 수 없었고, 로티 본인은 세속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과 정의를 한 눈에 파악하고자 하는 플라톤주의 기조를 포기한 지식인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 책을 쓰기로 한다.


그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라는 책에서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한 데로 묶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히려 나의 윤리적 책임을 내 특이 취향과 결부시켜 다른 사람과 엮으려는 유혹을 포기하는 게 바람직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신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불가분적으로 동일시할 것이고, 혁명가라면 사회적 정의라는 틀에서만 행동의 명분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다른 가치관이 궤를 같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를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만큼 무익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한 칸트의 여정을 비난한 점은 공감을 사기 충분했지만, 자본주의 철폐와 같이 중요한 문제에 무심힌 채 부르주아적 삶에 안주했던 프루스트를 비난한 점은 그렇지 못했다.

프루스트는 투쟁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게 프루스트를 싫어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사보나롤라가 예술 작품을 ‘허영’으로 평가했던 것이 부당했듯이 말이다. 사르트르와 사보나롤라의 정화 운동은 변질되었다. 그들은 한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를 보다 원대한 가치의 화신으로 여겼다. 이는 내게 중요한 게 남들에게 하등 중요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사고 방식이었다. 야생란이 아무리 고귀한들 남들에게는 이상하고 특이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또 내 취향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보편화된 취향이 특이한 취향보다 우월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남을 안 괴롭히고, 폭군 타도에 동참하고, 식량을 기부하는 등)가 있다고, 다른 사람과의 연대가 그 무엇보다 최우선시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기도 한다. 내가 도덕적 의무를 진다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인류 공통적인 이성, 본성, 신적 부성애, 윤리적 황금률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남의 고통에 공감할 뿐이다. 내가 남에게 공감하고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이 숭고한 가치에 부합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 대부분은 로티가 오랜 여정 끝에 얻은 이 같은 결론에 반발한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은 형편없고, 혼란을 유발하고, 무책임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3, 40년대 토마스주의자, 스트라우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듀이에게 던졌던 비판을 로티가 이어받은 셈이었다. 듀이도 로티와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게 보편적 가치의 증거가 아니라 그저 역사를 거쳐 집단으로 발전한 현상이라는 주장을 펼쳐 왔다. 듀이는 과학, 종교, 철학을 아무리 동원한 들 이상(idea)의 실존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상은 오랜 역사적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삶의 형태일 뿐이다.


듀이의 주장은 인류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얼마든 변형될 수 있음을 내포한다. 도덕적 의무감을 지우는 것은 통찰력이 아니라 훈련이다. 또한 사물에 대한 통찰이라는 개념도 언제든 의미가 변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과 취향은 우리가 자라는 환경의 문화적 소산이다. 우리가 악당보다 인도주의적인 이유는 통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서일 뿐이다.


듀이와 로티의 이한 관점은 종종 ‘문화적 상대주의(허무주의)’로 폄하되고는 한다. 하지만 도덕적 관점 모두의 장점을 인정하면 그건 상대주의가 아니다. 내가 어떤 도덕 관점을 최고라고 여기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관점이 최고로 여겨질 것이다. 그 자가 내 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본인의 관점을 굽힐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 점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향이 다른 두 철학자의 입장을 좁혀 줄 중립적 근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같은 말이나 반복하는 통에 중요한 질문을 회피한다는 오해만 쌓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노력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직관적 믿음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믿음 중에는 도덕적 신념도 포함되어 있기에 이를 완전히 체득하면 고결함과 박학함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앨런 블룸이(스트라우스 신봉자)나 테리 이글턴(맑스 신봉자)이라면 도덕 또는 정치 분야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공할 중심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 듀이나 로티는 역사 또는 인류학만 봐도 흔들림 없는 중심점이란 게 얼마나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상호주관적 합의를 여러 번 얻을 수 있을 뿐, 객관성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객관성이 상호주관성보다 나은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헤겔 시절부터 지금까지 크게 진척이 없었다. 요즘 철학자들은 ‘도덕 경험’ 대신 ‘도덕 언어’를, ‘주체와 객체의 관계’ 대신 ‘맥락주의적 지칭 이론’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는 큰 변화라 할 수 없다. 듀이가 복음주의 기독교 및 신헤겔주의적 범신론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과 같은 이유로 로티도 시카고에서 형성한 반듀이적 성향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헤겔이 칸트로부터 등을 돌리고 신과 도률을 역사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로티는 나이가 들수록 독서와 토론을 거듭했음에도 20대였을 때보다 ‘절대성’에 대해 아는 게 없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아예 플라톤의 환상과 거리를 두게 되었. 확실히 철학은 불량한 급우들과 나치의 실상을 고발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는 본인이 현실과 정의를 한 눈에 파악하겠다는 목표에서 진작 빠져나온 반면,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이 거기에 여전히 몰두해 있다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비판자들 운명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요인과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한 곳에 묶으려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랑, 권력, 정의가 우주나 인간 영혼의 본질, 언어 구조 또는 기타 무언가에서 기원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들은 지적 예리함, 그리고 그 예리함으로 발생하는 황홀한 통찰의 순간이 본인들의 도덕적 확신과 연관이 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일종의 보증을 바란다. 그들은 여전히 덕과 지식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으며, 철학적으로 옳은 판단이 그들의 행동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반면 로티는 철학적 판단이 나름 중요하긴 해도 우리 행동 전반을 지배할 요는 없다고 여긴다.


물론 철학이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기독교인들은 신이 인류 간의 사랑 이외의 것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설파할 때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칸트가 없었다면 19세기 사람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기독교 윤리와 다윈의 이론을 조화시키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다윈이 없었다면 휘트먼과 듀이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에서 벗어 자기 발로 서게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듀이와 시드니 훅이 없었다면 1930년대 미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프랑스와 남미의 경우처럼 맑시즘주의자들 때문에 난처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상에는 귀결이 있다.


그러나 사상에 귀결이 있다고 해서 철학자, 즉 사상의 전문가가 특별한 위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원칙, 토대, 이론적 진단, 포괄적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로티 또한 현대 철학자의 ‘임무’ 또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벙어리가 되고는 한다고 고백한다. 그 때 그가 기껏 내놓을 수 있는 반응이란 화학자들이 다양한 물질 조합에 익숙한 것처럼 철학 교수들 특정 학문적 전통에 익숙하다는 대답뿐이다. 철학자들은 과거 실험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종의 사상을 결합 또는 분리하고 나서 벌어질 일에 대 사견을 보탤 수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최소한 질문자에게 사색할 시간을 던져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혹자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 우주 구조의 핵심이라거나, 윤리적 책임감이 이성과 객관성에 근거한다는 사실보증해 줄 수 없다.


그래도 찰스 샌더스 퍼스를 인용하자면 그런 류의 질문에 듣기 좋은 답을 해 주는 ‘철학 잡화점은 곳곳’에 널려 있다. 하지만 답이 공짜는 아니다. 그 값을 지불하려면 밀란 쿤데라가 ‘누구도 진실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가 소설의 지혜를 이해할 권리가 있는 환상적인 상상의 세계’라고 부르는 곳을 등져야 한다. 포괄적 정의를 제공하겠다는 곳은 많을지 몰라도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으므로 유한자적 감성과 관용 정신을 잃을 가능성을 각오해야 한다.


데리다의 '놀이의 범위를 벗어난 전체 현존'이나 포괄적 정의를 찾는 시도 무익한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설령 그 비슷한 게 있더다로 그것이 옆사람의 관용 및 에티켓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듀이가 꿈꾸는 민주주의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그러한 상상에 빠지지 않는다. 해당 공동체에서는 인간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류 연대가 진정 중요하게 여겨진다. 로티는 민주주의적 세속 공동체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현대 공동체를 인류 최고의 업적으로 여긴다. 그에 비해 '트로츠키'와 '야생란'은 그저 부수적 요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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