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루카 Jan 05. 2022

중세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가 바라본 결혼


본 내용은 Philipp W. Rosemann의 『Peter Lombard: Great Medieval Thinkers』의 일부 발췌 번역문입니다.



그 어떤 관계보다 인간을 육체적으로 더 가깝게 이어 주는 성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순수 인간적 영역을 초월한 영역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통찰은 딱히 기독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향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필멸하는 생명체에게 있어 (성관계는) 탄생을 이끌어내고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불멸성을 내포하고, 따라서 성스러운 관계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이어서 출산이 왜 위대한지에 대해 설명한다.



필멸하는 존재는 최선을 다해 불멸을 추구합니다. 이를 달성할 방법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세대를 잇는 것입니다. 그래야 낡은 생명이 있던 자리에 새 생명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필멸하는 존재 모두는 이러한 방식으로 보존됩니다. 신적 존재처럼 영구히 같은 모습을 유지함으로써가 아니라, 시들었거나 낡은 존재를 원래의 모습을 닮은 신선한 존재로 대체함으로써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여, 필멸 존재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기타 다른 면으로나 불멸성을 띠게 됩니다. 그 외의 방식으로는 불멸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도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신성한 과정으로 여겼다. 다만 그의 설명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가미된다. 롬바르두스에 따르면 결혼은 특정한 은혜, 신성한 어떤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자 그것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성사에 해당한고 한다. 비록 그는 <명제집>에서 성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혼례를 가장 마지막에 다루지만, 그렇다고 혼례가 7성사 중 중요도가 가장 떨어지는 성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롬바르두스는 제26부에서부터 제42부에 걸쳐서 결혼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명제집> 판본의 약 100 페이지 분량에 달한다. 이중 상당 부분에서는 교회법에 대한 특정 논제가 다뤄지며, 그 중 특히 결혼의 걸림돌(이를테면 근친 관계) 그리고 이혼 및 재혼의 법적 근거에 대해 세부적으로 다뤄진다. 본 글에서는 롬바르두스의 결혼과 성사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심적인 부분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죄를 저지른 이후로, 그리고 죄에 의해서’ 정립된 다른 성사와 달리 결혼은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한다. 신은 에덴에서 속죄의 수단이 아닌 의무로써 결혼을 제정했다: “많이 낳고 번성하라(창세 1:28).” 인류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신은 결혼을 다시 제정하지만 여기에 성욕을 정당한 방법으로 해소하고 악덕과 죄를 억누른다는 새로운 목적이 도입된다. “죄의 결과로 우리는 육체적 섞임이 없을 수 없는 강력한 욕정을 타고나게 되었으므로, 성관계는 선한 결혼으로 사면되지 않는 한 부끄럽고 악한 행위로 남게 된다.” 한편 롬바르두스는 신의 1, 2차 결혼의 제정에 대해 한 가지 조건을 발견한다.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신의 명령은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부터 “번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혼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허락된 자율 행위로 기능한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간음을 피할 수 있도록 결혼이 허락된다고 하셨다.” 롬바르두스가 인용한 가르침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구절에서 연유하며, 정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각각 자기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각각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1고린 7:1-2 및 6).”



여기까지만 보면 롬바르두스가 혼례를 긍정적으로, 더 나아가 성사로 평가한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해소된다. 그는 사도 바울로의 “충고”가 어떻게 결혼의 허용으로 이어지는지 자문하고, 이에 대해 “충고”가 허용, 감면, 용납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답을 내 놓는다. “신약에서 충고는 사소한 선 그리고 사소한 악에 적용된다. 결혼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대할 일은 아니지만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사소한 선에 해당한다. 성관계는 무절제로 발생하는 사소한 악(쉽게 용서할 수 있는 악)이다. 전자(결혼)는 허용(인정)되고, 후자(성관계)는 금지되지 않기 때문에 용납(용인)된다.” 해당 구절에서는 혼인 관계에서 성관계가 허용되는 경우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결혼은 간음에 해결책이 되는 사소한 선으로써 허용되고 인정된다. 반면 혼인 중 해결책 이외의 목적으로 맺는 성관계는 사소한 악으로써 허용되고, 용납 또는 용인된다.



그리고 뒤이은 단락에서 롬바르두스는 사소한 선을 성사로 해석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갑자기 “결혼은 선하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어차피 신이 그것을 직접 제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창세 1:24). 게다가 요한의 복음서 2:2-11에서는 예수가 가나안의 결혼식에서 기적을 행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는 간음이 얽혔을 때를 제외하고 이혼을 금하기도 한다(마태 5:12 및 19:9). 이에 롬바르두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따라서 결혼은 선한 행위라는 게 분명해진다. 선한 행위가 아니라면 성사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성사는 성스러운 표지이다.”



이제 로바르두스가 혼례성사에 대해서 어떻게 고찰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혼인 관계의 어떤 실체(res)와 연관짓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결혼의 어떤 ‘실체’가 성사의 성격을 갖는가. 결혼은 성사이므로 성스러운 실체의 성사이자 성스러운 표지, 즉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곁들이자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통일(coniunctionis)이기도 하다. 그는 (창세 2:24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성사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배우자들이 서로 영적 조화와 육체적 섞임으로 통일을 이루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Ecclesia Christo copulatur)도 의지 및 본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형상을 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부와 신랑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본성의 순응으로, 사랑으로 결합된다. 결혼에는 이 두 가지 통일(copulae)에 대한 상징(figura)이 들어 있다. 배우자 간의 화합은 곧 사랑을 통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통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남녀의 육체적 섞임은 곧 본성의 순응을 통한 통일이다.



혼례는 ‘큰 성사’가 맞다. 남편과 아내의 영적 신체적 관계는 다름 아닌 신의 신비체에 해당하는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일을 재현한다. 이러한 통일에는 두 가지 면이 공존한다. 첫째, 신의 화신인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임재하는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사, 그 중 특히 성체성사를 제정했다. 둘째, 교회의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바친 (즉, 본질적으로 사랑 그 자체인 행위를 실천한) 그리스도에게 사랑으로 보답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통일과 사랑의 유대는 각각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본질적 통일과 영적 통일을 닮는다.



여기서 교회와 신부의 역할,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랑의 역할이 각각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리스도 그리고 신랑은 본성에 따라 각자 교회 그리고 신부와 결합한다. 신성한 본성을 가진 로고스는 인간의 본성을 취했고, 남녀의 혼인 행위는 남자가 (텍스트에 나와 있듯)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성적 상보성이 뒤따르면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주도권에 대해서 교회와 신부는 각각 대응되는 상대의 사랑에 사랑으로 화답한다. 따라서 결혼은 좁은 의미에서 교회로 기능하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의 관계를 나타내는 형상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계에는 상호적 사랑으로 강렬한 생기가 불어넣어진다. 이쯤에서 상기 인용한 단락 이곳저곳에 성적 은유가 등장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제집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서술할 때에도 통일(coniunctio, copula)과 같은 용어가 거리낌 없이 쓰인다. 굳이 이 용어가 쓰인 것은 결혼의 위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해당 비유법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비체 사이에 일어나는 활력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이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가 결혼을 죄에 대한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제시했던 초반에 대비하여 매우 혁신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혼례성사는 구조적으로 고해성사와 유사하다. 양 성사 모두 실체와 한 쌍을 이룬다. <명제집> 제26부 후반부 및 그 뒤를 잇는 단원에서는 결혼의 성스러운 요소 두 가지, 즉 부부의 영적 통일과 육체적 통일 간의 관계와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드러난다. 이 때 가장 먼저 다뤄지는 질문은 합방이 없는 부부의 관계도 유효한 결혼 생활에 해당하느냐이다. 즉, 부부의 유대를 구성하는 가장 첫 번째 요소는 육체적 통일이냐, 영적 통일이냐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 때 양극단은 지양되어야 한다. 만일 혼인을 두 사람의 평범한 삶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면 “남매나 부녀도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만일 부부의 유대의 첫 번째 요소로 성관계의 합의(consensus carnalis copulae)를 제시한다면 예수의 인간 부모이자 경건 그 자체의 삶을 살았던 성녀 마리아와 성 요셉의 혼인은 무효가 되는 셈이 된다! 롬바르두스에 따르면 “이는 불경한 사상(Quod nefas est sentire)”이다. 부부의 유대에는 두 사람의 동거나 성적 통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공동체 의식이 요구된다. “함께 하는 삶이나 육체적 합일만 있어서는 혼인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대신 “부부적 동지애와 합의(consensus coniugalis societatis)”로 함께 살아야 부부의 유대가 발생한다.



롬바르두스가 제27부에서 형식적으로 제시하는 결혼의 정의를 보면 부부적 동지애의 본질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결혼은 “남녀 개인의 생활방식에 제동을 거는 (individuam vitae consuetudinem retinens) 올바른 부부적 통일”이다. 롬바르두스에 따르면 개인의 생활방식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이를 테면 배우자의 동의 없이 순결을 맹세하거나 수도회에 들어가거나, 또는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교를 맺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보다 적극적인 표현을 쓰자면 부부는 자신을 아끼는 만큼 서로를 아껴야 한다(ut invicem alter alteri exhibeat quod quisque sibi). 이 같은 가르침에는 배우자 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신은 인간에게 “노예나 주인”을 내리지 않았듯, 남성의 곁에 지위가 불평등한 여성을 내리지 않으셨다.



결혼에는 부부적 동지애(coniugalis societas)라는 특수한 통일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부부적 동지애에는 어떤 성역할이 있을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롬바르두스는 결혼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는 내내 마리아와 요셉의 혼인 관계를 염두에 둔다. <명제집>의 저자는 예수의 인간 부모를 부부적 모범과 이상으로 삼지만, 한편으로 마리아와 요셉이 성관계를 맺지 않은 점에서 예외성을 인지한다. 롬바르두스는 이러한 딜레마를 다음과 같은 구분을 통해 해소한다: 마리아와 요셉의 혼인 관계는 신앙인으로서 완벽했지만, 혼인의 정의에 완벽히 부합하지는 못했다. 둘은 성관계를 맺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중 통일에 완벽히 부합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한 셈이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순결 서약을 통해 성스러운 부부로 거듭났다. 게다가 마리아와 요셉은 부부 관계의 세 가지 덕에 대한 모범을 실천했다: 바로 배우자 간의 신의, 자녀 양육 그리고 부부 관계의 신성한 결속력이다.



<명제집> 제26부-제42부에는 흥미를 일으키는 주제가 이 외에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결혼관 중 핵심 내용을 살펴봤으니 더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명제집>의 해설자 몇몇은 롬바르두스가 성사를 두고 은혜를 효과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표지라고 나름대로 정의하는 대신, 결혼의 성사(聖事)적 측면에 대한 결정적인 설명은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그는 혼례성사가 실체(res)를 어떻게 발생시키는지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마샤 콜리시 교수는 롬바르두스라면 이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추가 설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는 부부의 육체적 통일에 대해서 “서약에 이은 정신과 마음의 통일로써 받은 은혜의 발현”이라는 해석을 내 놓을 수도 있었다. 물론 롬바르두스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의 신비체 사이에서 얻어진 활발한 사랑이 부부에게 흘러들어, 영적 합일의 활성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관계 속 발현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시원히 묘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혼례성사와 관련된 인과관계 문제에서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필자가 봤을 때 롬바르두스가 성사에 대한 최초 설명에 개연성을 맞춰서 결혼을 설명하려면 배우자 간의 영적-육체적 통일이 일으키거나 야기하는 것 중 어떤 게 실체(res), 즉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영적-자연발생적 통일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답이 있는 문제일까? 차라리 고해성사의 설명 모델대로 자연에서 은혜 순이 아니라, 은혜에서 자연 순으로 인과관계를 역전시키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혼례성사에서 실체(res)가 드러날 때 그 실체가 성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도면 참조).



나는 도면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형이상학적 결혼과 남녀의 실제 결혼이 양태만 다를 뿐 사실은 동일한 사랑의 역학을 따르고 있음을 제시하고 싶다. 양 쪽 모두 비록 그 방식은 다르지만 성령이 깃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성사로서 인간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배우자의 결혼을 상징하고, 한편 배우자는 역으로 그리스도교 결혼의 패러다임이자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도 이러한 해석이 롬바르두스의 텍스트를 벗어났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문제의 해결을 제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렇게나마 텍스트의 의도를 이해하고 싶다.

<도면: 혼례성사 속 사랑의 역학>






작가의 이전글 샐러맨더와 담뱃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