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Dec 19. 2023

"얘 집까지 좀 데려다줘"


미국에서 차 없이 산지 벌써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다. 미국에서 자차 없이 생활한다는 게 처음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병원 근처에 있는 저렴한 월세방을 찾아서 큰 불편함 없이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한국에서 겪었던 지옥철에 비해 아침마다 잘 꾸려진 주택가를 구경하며 출근하는 건 복에 겹다고 느낄 정도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눈에는 내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나 보다.


"비 오는데 걸어가려고? 내가 데려다줄게!"

"오늘 밖에 진짜 추워. 조금만 기다려, 나 금방 일 끝내고 너 데려다줄게."


우산과 손난로를 늘 챙겨 다니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거절하지만 동기들은 한산코 데려다주겠다며 주차장까지 기어코 데려간다. 이런 배려가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가끔은 빠르게 일을 마치고 몰래 떠나기도 한다. 민폐를 끼치기 싫은 것도 있지만, 나보다 훨씬 어린 동기들에게 차를 얻어 타는 게 부끄러운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어느 날은 친구가 내 옆자리의 동기에게 다가와 "난 좀 일찍 떠나는데 너 갈 때 써니 집에 좀 데려다줘"라고 하는 게 아닌가. 옆자리 동기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제3자처럼 이 대화를 옆에서 듣는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얘보다 빨리 일을 끝내서 집까지 기어코 걸어가겠다고.


동기가 옆에서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자는 동안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환자 차트 작성을 끝내고 조용히 짐을 챙기고 코트를 입었다. 하지만 그 순간 동기는 부스스하게 일어나며 일 다 끝냈냐며, 데려다주겠다며 일어나는 게 아닌가. 오후에 외래 환자가 있지 않냐고 물어보니 환자들이 진작에 다 예약을 취소했고, 자기는 날 데려다 주려 여태껏 낮잠 자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아까 네 친구가 부탁했잖아. 얼른 가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퇴근 시간을 한 시간이나 미루면서 기다리는 놈이 어디 있냐고 성을 내고 싶었다.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그리고 서른 다 되어 나잇값을 못한다는 부끄러움 등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그날도 나는 염치없게 동기의 차를 타고 집까지 무사귀환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나와 같이 장롱면허 신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큰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건 미국과 달리 한국의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도 집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지만 한국처럼 도착 시간이 게시되어 있지도 않고 교통카드를 온라인으로 충전해야 해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아직 버스를 타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처음에야 길을 잘 몰라 우버로 출퇴근을 했지만 이제는 매일 운동삼아 걸어서 병원을 간다. 겨울이 되어 해가 빨리 저물어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진 않지만, 최근 들어 주택가의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화려하게 길을 밝혀 주어서 그 광경을 즐기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차를 능숙게 운전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의젓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차를 살 생각은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직 혼자서 운전하기가 두려워서이다. 한국에서 면허 시험을 합격한 이후 거액을 투자해 한 달간 운전연수도 받고 그것도 모자라 집 앞에 있는 실내 운전 연습장에서 꾸준히 주차 연습도 했지만 난 아직도 운전대를 잡는 게 두렵다. 뭐든 처음이 가장 힘든 법이지만 병원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는 환자들을 많이 봐서인지 쉽게 시도해 볼 마음이 들질 않는다. 


앞으로도 과분한 챙김을 받는 날들이 많아질 것 같지만 한국인 동기 한 명 없는 이 외지에서 이렇게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 준 내과 동기들에게 늘 감사하다. 나중에라도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날이 온다면 그동안 못 가봤던 미국 여행도 자유롭게 다니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착실한 김비서가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끝나지 않는 경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