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 저자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군가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반대로 어디선가 차별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특혜를 받은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 한다.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특권을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우리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차별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행동이나 태도를 쉽게 정하지 못하고 결단을 내리지 모하는 일을 우리는 '결정 장애'(1)라고 표현한다. '장애'라는 단어를 선택해 쓰면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결정 장애'라는 용어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용한다. 이렇게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도처에 깔려있는 차별을 '먼지 차별'(2)이라 부른다.
'결정 장애'라는 용어가 장애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도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결정 장애'만큼 완벽하게 그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기에 사용하는 것뿐이라 한다. 하지만 정말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혹은 그 가족들도 '결정 장애'라는 표현을 우리처럼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내뱉을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쉽게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우리 또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지 차별의 또 다른 예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한 '여학교'라는 표현이다. '남학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여중, 여고'에는 항상 '여'라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서도 '여직원, 여류 작가'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 성별을 나타내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면 예민한 페미니스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먼지 차별이 널리 존재하는 것은 아직 우리가 먼지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치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세먼지가 우리 몸에 무해한 것이 아닌 것처럼, 먼지 차별 또한 우리에게 무해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상처가 없다 하더라도 많이 쌓이면, 결국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