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희 May 18. 2022

5월의 어느 날

그날의 기억

   약 30년 전쯤, 나는 유치원에 있었다. 자유 놀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들어서려는데, 무슨 일일까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이 내 주위를 빙 둘러싼 것처럼 보인다. 교회의 작은 기도실 문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얹고 서 있었는데, 개구쟁이 남자아이 하나가 내가 손가락을 얹고 있던 기도실 철문을 밀어버린다. 나는 뒤로 넘어졌고, 얼얼한 느낌이 가득하며 주위는 피로 젖기 시작했다. 철문에 손가락 반 마디 정도 아예 잘려 나간 것이었다. 너무 큰 충격에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한 손은 휴지를 둘둘 만 상태로, 또 다른 손은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서 계속 어디론가 갔다.


   병원에서 병원으로, 그리고 또다시 병원으로 나는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 엄마가, 아빠가 내게 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제법 큰 정형외과에 먼저 갔다가 평생 짧아진 손가락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엄마는 계집애 손이 그러면 못 쓴다며, 대학병원 응급실로 나를 다시 데리고 갔다. 응급실에 들어서니 하얀 옷을 입은 의사들 여러 명이 나와서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 머리맡 주변에 서서 태연하게 내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생 오른손이 4개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다시 기절한 엄마는 4개 보단 짧더라도 5개가 낫겠다는 생각에 처음 갔던 정형외과로 나를 다시 데리고 갔다.


   그날 내가 기억하는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수술실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날은 5월 4일, 바로 어린이날 전날이었다. 엄마는 어린이날에 나들이 가려고 김밥 재료 사러 장을 보러 나가서 유치원에서 아무리 집으로 연락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회사에서 일하던 아빠에게 먼저 연락이 닿았고, 뒤늦게야 엄마에게도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내 손을 보고 한 번 뒤로 넘어갔고, 대학병원에서 손을 절단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또 뒤로 넘어갔다고 하셨다. 그날부터 엄마는 5월이 되면 다시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자꾸만 조마조마하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의 불안감은 다음 해에 한 번 더 적중했고, 나는 다음 해 5월에도 병원에서 며칠간 지내면서 수술받아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때 당시 내게는 중요한 수술이었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5월에 큰 사건은 더 터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여전히 5월이 되면 그때 일들이 떠오르며 불안하다고 하신다. 무사히 잘 넘어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하신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흐르고, 나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느 날 우리 큰 아이는 들떠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집에는 모처럼 외할머니도 와계셨고, 유치원만 갔다 오면 저녁에 할머니 댁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치원에서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모든 게 너무 좋은 날 아침, 아이는 들뜬 마음으로 유치원으로 갔다.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좀 편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내고 출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치원에서 연락이 왔다. 근무시간에 연락이 와서 불길한 마음에 조심스레 연락받으니 아이가 갑자기 계속 구토를 한다고 하셨다. 아침에도 컨디션 좋게 도착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토를 하기 시작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연락하셨단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한 번씩 장염 증상을 보이면, 병원 가서 수액을 맞는 그 순간까지 토를 멈추지 못한다. 다섯 번이고 열 번이고 물을 단 한 모금만 마셔도 계속 토를 한다. 단순 복통을 넘어서 이미 시작된 구토로 아이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유치원 안에서 누워있단다. 다행히 집에 계시던 엄마에게 연락해서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결국 그날도 여러 번 구토를 하다가 마지막엔 수액을 맞고 나서야 아이의 구토는 멈췄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아침에 보던 얼굴빛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날도 어린이날 전날이었다. 내가 사고당한 어린이날 전날도, 아이가 아팠던 어린이날 전날도, 모두 여섯 번째 어린이날 전 날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나 아이가 기억도 못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날의 일을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또는 유치원에서 행사하던 장소를 지나치게 되면 어김없이 이야기한다. 정말 좋은 날이었는데, 엄청 기대했던 날이었는데, 갑자기 아파서 토하는 바람에 친구들하고 놀 수도 없어서 정말 많이 슬펐다며 여전히 이야기한다. 이제는 우리 엄마뿐 아니라, 내가 그리고 우리 아이가 5월이 되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자꾸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 어린이날 다친 손의 흔적은 여전히 선명하게 내 몸에 남아있지만 그때의 아픔은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처럼, 아이에게도 그날의 기억은 조금 더 흐려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안녕, 인계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