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 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내 몸보다 내 손이 느렸나 보다. 평소에 잘 닫히지 않던 문은 그날 유독 잘 닫혔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내 손은 문에 끼었다. 내가 문 닫다 내 손 다쳤다는 창피함이 밀려오는 순간, 엄청나게 강한 통증이 몰려왔다. 오른쪽 검지에 얇은 줄이 그어지면서 그 틈에 피가 흘러나왔다. 티슈를 하나 집어 들어 지혈하고 조심스레 티슈를 떼보니 손톱 안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없어지지 않는 통증, 멈추지 않는 피, 티슈를 둘둘 손에 감싸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통증에 눈물이 흘렀다. 눈물과 함께 또 다른 기억도 흘러나왔다.
34년 전 5월, 교회 부속 유치원 자유 놀이 시간이었다. 작은 철문이 있는 기도실 안에서 놀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철문에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 서 있었는데 한 남자아이가 그대로 문을 밀어버렸고 나는 넘어지며 가운뎃손가락 일부가 잘려 나갔다. 엄청나게 강한 통증, 살이 뚫리는 느낌이 뭔지 세상에 태어난 지 만 5년 3개월 만에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통증, 휴지로 손가락을 칭칭 감싸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던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마흔을 앞둔 나는 그보다도 훨씬 더 약한 통증에 눈물을 흘리는데 다섯 살의 나는 울지 않았다. 단순히 아프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통증은 상당히 강렬했다. 그 이후로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없다. 몸의 일부가 관통되며 오는 통증을 다섯 살의 나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나를 밀친 그 아이 이름을 스케치북에 쓰고 검은 크레용으로 박박 낙서하고 종이를 찢어버리곤 했다. 그 아이는 끝내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사과일지언정, 두 아이 불러 세워놓고 강제로 하는 사과조차 받은 기억이 없다. 손가락이 잘리고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그 아이가 진심으로 사과했더라면 그제야 오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좀 더 가벼운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때 나는, 나의 부모는 누구에게도 사과받으려 하지 않았을까.
평화로운 5월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고, 그날은 어린이날 전날이었다. 다음날, 놀러 갈 준비를 하기 위해 김밥 재료를 사러 갔던 엄마는 뒤늦게 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내 손을 보고 기절했다. 첫 병원에서 수술은 가능하지만, 평생 흉이 남을 거라 했다. 엄마는 여자 아이 손에 흉이 생기면 안 된다며 대학병원에 데려갔다. 나는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천장에 있는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머리맡에는 여러 명의 의사들이 둘러서서 가운뎃손가락을 절단하자고 했다. 엄마는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나는 다 알아들었다. 울며 그들에게 떼쓰지는 않았지만, 잘린 손가락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 순간 상상하고 있었다. 너무 어리니까, 제대로 울지도 못하니까 아무 말도 못 알아들을 거로 생각한 어른들과는 다르게 그때의 나는 필요 이상으로 조숙했다.
내가 울지 않았던 건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눈물 흘릴 타이밍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상상 이상의 통증으로 모든 신경이 몰려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내게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 손이 잘려서 피를 흘리는 아이에게는 그 흔한 표현, '괜찮아?'도 사치였을 것이다.
그때 내가 울었더라면 어땠을까? 울었다면, 그 아이에게 사과받지 않았을까? 울었더라면 그 부모도 찾아와 사과하지 않았을까? 손가락을 아예 절단하자는 말을 듣고 피가 흘러넘치는 손으로 의사 뺨을 때리기에는 너무 어렸다면, 더 악을 써 울었다면, 의사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말을 어려도 다 알아듣고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가 되진 않았을까? 그때 내가 울었더라면, 다 표현했더라면, 그 아이 이름에 낙서하며 분풀이하던걸, 혼자서 몸에 남은 흉터를 보며 울고, 후유증에 고생하던 걸 조금 덜 하지는 않았을까?
마흔을 앞둔 나는 그보다 훨씬 약한 통증에도 눈물이 나는데, 훨씬 어린 다섯 살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을 평생에 걸쳐 나눠서 울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