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닿을락 말락 한 상태로 퇴근한다.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여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출근 때와는 다르게 엉망이 되어버린 거실을 마주한다. 그 순간 결국 차버리다 못해 넘쳐난다. 그건 바로 '분노 게이지'다. 분노 게이지는 게임할 때 부스터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게임을 할 때 조금씩 쌓아둔 에너지가 일정 양을 다 채우게 되면 부스터가 되어 순간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에너지가 다 채워지기 전까지는 부스터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내 분노 게이지도 비슷하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최대한 나의 분노를 자제한다. 특히 일할 때는 더 조심스럽다. 나의 모든 감정을 감추며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분노는 금기사항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의 화를 표출했다면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최대한 분노는 감추고 이성적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때로 나의 분노 게이지는 끝까지 올라간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는 집에 들어서고 아이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바로 폭발해버리고 만다. 별일 없는 날은 분노 게이지가 아직 여유 있는 상태로 퇴근해서 몇 시간은 무탈하게 버티기도 한다. 아이들을 재우고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잠들기 직전에 게이지가 다 차버려서 확 소리를 질러버리는 날들도 있다.
아이들을 낮에는 보지 못하고, 아침과 저녁에만 만나는 사이가 되다 보니 하루 동안 내게 쌓인 분노 유발 요인에 따라 그날 저녁 집에서 나의 폭발력이 결정 날 때도 있다. 육아는 일관성 있게 해야 하는 데, 아이들에게 나는 일관성 없는 엄마가 되어버린다. 똑같이 어질러진 거실이라 해도 어제의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엄마는 화를 내고, 내일의 엄마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분노 게이지에 양을 늘려보려 노력도 해봤지만 무의미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꾹꾹 눌러 담아놓은 나의 분노는 쉽사리 어딘가로 공중분해 되지 않았다. 깊이 눌러 넣을수록 터져 나오는 폭발력만 커질 뿐이었다. 대중교통으로 퇴근하는 길은 빠르면 50분, 길면 1시간 20분이나 걸린다. 긴 출퇴근 시간으로 힘든 날도 있지만 대체로 이 시간이 소중하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그때는 유튜브를 켜거나, 음악을 들으며 내 분노 게이지를 조금씩 낮추고 있는데 커가는 아이들의 분노 유발 요인은 이전과 달리 내게 주는 타격감이 심하다. 그래서 또 다른 방법을 찾았다. 퇴근 후 30분 동안 혼자 밥을 먹는 그 시간을 사수하기로 했다. 내 에너지가 먼저 필요하니, 아이들이 다가와도, "엄마 밥부터~"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