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헤어질 결심

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17)

by 김세인

영화 속 한 여자는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과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그 남자가 품위 있어서, 남자는 그 여자가 꼿꼿해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될수록 차차 헤어질 결심을 한다. 사랑하는데 헤어질 마음을 품는다는 것. 너무나 애틋해 나는 영화 원본이 담긴 책까지 샀다.

우리 집 어린이도 그런 마음을 낼 줄 몰랐다.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벗 삼아 놀았다. 얼음땡 놀이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놀이터엔 친구가 없는 날도 많았다. 가끔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면 귀찮은지 기억이 안 난다 하기도 하고, 학교 독후감 숙제는 끝끝내 못 내기도 했다. 한 번 만화책을 들면 한두 시간은 꿈쩍도 안 했다. 책이 왜 좋으냐고 하면 그저 재미있어서라고 하는 어린이.


그랬던 그녀가 얼마 전 갑작스럽게 중대한 결심을 통보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속 박해일처럼 분위기 있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만화책들과 헤어지겠다고. 탕웨이처럼 나름대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이다.


유아기 때는 영어책을 거부하고, 그림책들을 실컷 읽었다. 저학년 때는 수많은 만화책들을 섭렵했다. 만화책의 세계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었다. 끊임없이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흔한 남매』 시리즈, 『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을 비롯한 역사 만화들, 카카오 캐릭터들이 세계를 여행하는 『Go Go 카카오 프렌즈』, 화려한 그림과 스토리에 홀딱 반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 대결 구도가 흥미진진한 『내일은 실험왕』, 유튜브 방송 인기작 『급식왕 Go』, 『민쩌미』.....


나도 도서관에 가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책을 집게 되었다.

가끔 학교 공부에 도움이 되려나 싶어 과학책이나 수학 동화를 한두 권 끼어놓으면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숙제는 안 하고 몇 시간을 만화책만 보고 있으면 내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오려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바닥에 엎드려 낄낄대는 재미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어느 날, 친구네 아이와 놀이공원에 가는 길이었다.


“누나랑 형아도 우주에 가고 싶어? 나는 화성에 가 보고 싶어.”

“아니, 나는 지구가 좋아. 우주는 블랙홀 때문에 무서워.”

“난 화성에 가서 외계인이 사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거기까진 괜찮았다.


“형아, 있잖아. NASA가 달에 얼음이 있다는 걸 발견했대. 수소랑 산소 원자를 합하면 달에서 우주비행사가 물을 만들어낼 수 있잖아! ”

“그게.. 그렇지. 수소가..... ”


내가 물었다.

“정인이는 어떻게 그런 걸 알게 됐어?”

“과학책에서 읽었어요.”


그러고 보니 정인이 엄마의 차에도, 집에도 여기저기 과학책들이 있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과학 지식의 조각조각들을 총동원해 동의하는 척했다. 명색에 2학년, 4학년 누나와 형인데 자존심을 겨우 세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아챘다. 속으로는 자존심에 살짝 스크래치가 났다는 사실을. 중력, 헬륨, 규소, 궤도.... 분명 익숙한 단어들인데 설명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과학동아도 열심히 읽었는데 만화만 읽고 던졌던 날들이 떠올랐을 테다.


대화가 계속되면 동생 입에서는 E=mc² 같은 공식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떤 놀이기구를 탈 거냐는 누나의 말에 그들의 대화 주제는 황급히 바뀌었다.


얼마 후, 아이가 말했다.


“엄마, 회전책장에 만화책 안 보이는 곳에 숨겨줄래요?
문학책이나 만화책이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그것만 보게 되니까.과학책 10권 읽으면 문학책 1권 읽을 수 있는 쿠폰을 주면 어때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책들을 뒤로 하고, 비문학 책을 읽어보겠다니. 마치 내가 매일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뒤로 하고, 생강차를 마시겠다는 결심 같다고 할까.


아이로서는 큰 결정일테다. 나는 자칫 아이가 그러다가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됐다. 비문학 책들을 읽고 지식을 쌓으라고 지금껏 열심히 도서관에서 책을 나른 건 아니었다.


사실 나도 인문학 편식을 하다 보니 일부러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코스모스』를 같이 읽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어떤 날은 달달한 크림이 올라간 아인슈페너를 마시고 싶은 날이 있는 것처럼 편향된 독서를 하다 보면 반대편에 있는 세계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실컷 읽다 보면 어느 날 새로운 자극을 찾는 날이 온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북극에 관한 책이라던가 양자물리에 관한 책이라던가.



어쩌면 아이도 조금 더 수준 높은 문해력을 요구하는 책들 또는 지금껏 읽기를 꺼려 했던 과학책들을 언젠가 읽어야겠다 생각했을지 모른다. 엄마가 서비스로 빌려다 주는 만화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 되어 뒷전으로 했던 책들을 펼쳐봐야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요청에 따라 나는 어린이 도서관에서 항상 가던 섹션과 다른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과학 섹션으로 가서 얇고 쉬워 보이는 책을 펼쳐보았다. 몬스터 과학 시리즈의 『세포야 쪼개져라』가 눈에 띄었다. 글이 빽빽하지 않고 삽화도 많아 그림책 같았다. 주변에 있는 책을 살펴보니 그런 책들이 많았다.


내가 봐도 읽기 싫을 것 같은 억지스러운 수학동화나 딱딱한 책들은 빼고 10권 정도를 가방에 넣었다. 반납대에 있는 『흔한 남매 과학탐험대』를 집을 뻔하다 꾹 참았다.




아이들을 위한 비문학 도서들을 읽어볼수록 내 예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빌려온 책들을 내가 읽으면 지금이라도 수능을 다시 볼 듯 똑똑해질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위한 과학책들은 최대한 단순하고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캐릭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재미있었다. 스토리 속에 자연스럽게 과학 지식이 녹아든 책도 많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내가 빌려온 『세포야 쪼개져라』가 꽤 재미있다고 했다.


아는 동생이 신나서 쏟아내던 과학지식들이 빛나 보였던 그 날이 문제집에서 한 문제 더 맞는 일로 발전되기보다 우주를 마음껏 상상하는 초신성이 되길 바란다. 학교 과학 시간에 손을 들고 엉뚱한 질문을 할 수 있길 바란다.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발효되어 독서의 세계가 확장되는 길을 열어주길 희망한다.


며칠 가지 못한다 해도 나는 아이의 결심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달콤한 디저트를 먹었다면 이제 담백한 디저트도 음미해보겠다는 시도처럼. 독서라는 세계에서 자신의 지평을 넓혀보려는 도전으로. 술술 넘기던 책장을 더디게 넘겨야겠지만 색다른 자극을 찾아보려 노를 젓는 일로.


그녀의 결심이 지켜지든, 아니든 나는 그저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나는 박해일 같은 남자와, 몇 번을 끊기로 결심했던 커피와 헤어지지 못할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함께 읽는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