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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생각러 Jan 19. 2023

'우월한 비주얼'이라는 표현이 주는 불편함

클릭 안 하자니 궁금하고 클릭하면 쓸데없다 싶고

아침 출근길, 카톡 뉴스란을 넘기다 특정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우월'한 비주얼, '우월'한 DNA, '우월'한 미모, '우월'한 기럭지...


쭉 보다 보니 재밌기까지 하다. 예전부터 '우월'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무엇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판단하기에 '우월'하다는 글자를 붙이는 걸까. 도대체 뭐가 우월한데?


네이버에서 '우월' 키워드를 넣어 뉴스를 검색해 봤다.

'우월'하다 찬양하는 대상은 연예인들이 거의 대부분이며, 찬양을 받는 것은 신체적인 특징이다.


'우월'로 검색해 본 기사 리스트


하루에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우월한 외모'들. 아, 외모나 신체적인 면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매력이 있으니 감탄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게 꼭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만 감탄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사 키워드로 '만찢(만화를 찢고 나온)'이 있다. '만찢'으로도 검색해 보니 역시 외모 찬양이 대부분이나, 확실히 기사 생성량에 비해서는 '우월'을 이길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연예인과 '우월' 키워드는 하나의 대명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과 '우월' 키워드는 기사 클릭을 부르는 세트 상품임에 틀림없다.  


'우월한 기럭지' '우월한 민낯'도 기저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상반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다리, 화장하지 않아도 잡티 없는 흰 피부, 작은 크기의 머리.

상대적으로 짧은 다리, 큰 머리는 희화화의 대상이 되며 머리가 작은 연예인은 '우월한 비율'을 가진 찬양대상이 된다.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분노하면서도, 백인의 신체적 특징을 찬양하는 이 아이러니함.

물론 백인 우월주의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관점에서 몇 세대를 거쳐 공고히 쌓여온 보이지 않은 암묵적인 사회적 인식이다.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생활양식 같은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연예인들 또한 직접 이렇게 기사 타이틀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기자들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다.

기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확대 생산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기사의 목적이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클릭을 하고 싶게끔 제목을 쓰는 것은 당연한 시장 논리이다.


때때로 그 시장논리에 연예인들이 피해자가 된다. 일부러 우스꽝스런 사진을 걸어놓고 '우월한 비주얼' 제목을 단다던지, 그저 대중들의 가십거리,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연예인이 사회적, 신체적인 매력이 높은 만큼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모방심리는 뗄레야 뗄 수 없다. 따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러러보는 심리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게 꼭 '우월'이라는 감탄사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월'이라는 단어에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그 계급의식을 무의식 중에 강요받는 것 같다.

그래서 불편하다.


무분별한 '주입식 우월 찬양'에 노출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정서적 노예를 자처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사 제목이 주는 특정 시각에 갇혀 편협한 사고를 가지게 되는 건 아닌지,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스스로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월' 키워드가 보이면 '병먹금(무시)'을 실천하려고 한다. 클릭하지 않도록.

클릭하지 않으면 그 단어는 시장논리에 따라 도태되겠지. 단어가 소멸될 순 없어도 특정 대상과 연결되는 일은 줄어들겠지.


이제는 '절대적인 칭찬과 찬양'을 해주세요, 남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칭찬' 말고.

그럼 사회전체가 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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