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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이 Apr 13. 2024

EP 1. 외롭지만 상처받기도 싫어

고슴도치 딜레마 

추운 겨울 어느 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하기도 했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반면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의《행복론과 인생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 뭉치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의 가시에 의해 상처를 받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해야 하는 역설이 담긴 슬픈 우화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또한 쇼펜하우어의 일화를 소개하며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함께 살려는 본능을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함께 살아야 하는 걸까?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선조들은 집단에 소속되고 그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고슴도치는 적어도 자신을 보호하는 가시를 가지고 있지만, 벌거벗은 개인은 자신을 지켜줄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를 맺고 연대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였고, 장점이었다. 

따라서 관계가 주는 날카로움에 찔리고 상처를 입더라도 타자에게 다가가는 존재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다. 



수많은 심리학 연구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우선,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몸에 나쁘다. 

사회적 연결성이 떨어지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적 문제가 증가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궁극적인 이유를 '사회적 고립'으로 꼽기까지 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유를 항상 갈망하지만, 무제한적인 자유는 고독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가시에 찔리면 상처를 입지만, 홀로 있으면 오롯이 스스로의 체온으로만 얼어붙은 몸을 녹여야 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관계가 주는 구속과 제한이 고독보단 나은 셈이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배척받거나 고립되면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정신 질환에 쉽게 걸린다. 

관계 맺기를 더 피하게 되고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변 세계와 자신을 왜곡하게 된다. 

쿠키를 두 배 더 많이 먹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기까지 한다. 


중독에 빠져드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온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은 실제로 체온이 떨어지고, 방의 온도를 춥게 느끼고, 

따듯한 음료를 찾는다. 소외당한 이들은 실제로 지능지수가 떨어진다. 실업 같이 직업적 실패를 겪고 사회에서 배제당했다고 느낀 이들은 술이나 마약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기도 한다. 

탐욕과 중독마저도, 공동체에 소속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고슴도치의 욕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셈이다. 


한국의 사회적 고립도가 OECD 최고 수준인 것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받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럴 때 우리는 가시를 날카롭게 세운다.  
더 이상 나를 상처 입히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고립된 이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묻지마 테러'를 일으키는 것도 고립과 관련이 깊다. 한 실험에 따르면, 인기투표에서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을 외면한 이들에게 듣기 싫은 소음을 가장 많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비슷한 실험에서도 따돌림을 받은 이들은 핫소스를 엄청나게 많이 뿌려 자신이 당한 고통을 되돌려주려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이들에게도 그랬다.


우상으로 여기던 머레이 프랭클린에게서 조롱받자, 조커로 흑화한 아서 플렉처럼 말이다. 




 만약 아서에게 단 한 사람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두에게 조롱받고 무시당하던 그에게 따듯한 한 마디를 건네주고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커가 아닌, 여전히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코미디언을 꿈꾸는 아서 플렉으로서 내일을 살았을 것이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단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실제 실험으로도 그랬다. 


똑같이 사람들에게 외면받더라도 자신을 지지해 주는 한 명이라도 있었던 피험자들에게선 불특정 다수에게  공격성을 표출하는 성향이 절반 이하로 나타났다. 단 한 명이라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조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괴물이 되는 이들은 생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따듯해져야 하는 이유다. 





※ 다음 글에선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글을 통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관계, 진정한 사랑에 대해 고민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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