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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이 Apr 22. 2024

EP1.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가?

헤겔의 변증법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중에서 -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이 5단계의 위계로 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본주의 심리학을 창시했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설의 가장 밑바닥에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가 자리하고 있고, 순서대로 안전의 욕구, 애정과 공감의 욕구, 존경의 욕구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이어진다. 






 물론 매슬로는 본능과 가장 가까운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서는 안전이나 애정의 욕구 같은 상위 단계의 욕망이 충족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일단 식욕이나 수면욕 같이 필수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 계단 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이라는, 

가장 높은 수준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활용해 꿈을 이뤄나가고 독립성을 쟁취한다는 것은 매슬로의 심리학에서도, 

현실에서도 평범한 소시민이 이루기 힘든 일이다. 

매일 현실에 치여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오거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의 철없는 이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 인정의 욕구 단계에서 좌절하거나,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미 개천에 용 나기가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성공하고 모두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망상에 불가하지 않을까?



 독일 철학을 집대성한 헤겔의 문제의식 역시 여기서 출발한다. 




 헤겔이 보기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신을 확대하고 발전해 나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자의식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을 받을 때에만 탄생하기 때문이다.

울기만 하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채워주는 아이들이 

세상을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면서 젖떼기라는 '최초의 거절'을 경험한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부모라는 존재를 인식한다. 

그렇게 서서히 자아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가 되며, 

점차 동료나 친구, 연인에서부터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인정과 존중을 바라는 존재가 되어간다. 



결국 인간은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고 소유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강화시켜 나가기 위해,
타자를 부정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화의 과정에서, 

종속되는 쪽이 노예이고, 타자화에 성공한 쪽이 주인이 된다. 


패배한 누군가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누군가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헤겔은 이를 인정 투쟁이라고 불렀다. 


매슬로가 욕구의 4단계인 '존경의 욕구'를 인간 욕망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생각했듯이 

헤겔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는 욕망을 삶의 본질적인 문제로 본 것이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다. 


마치 지금 우리 모두가, 

SNS를 통해 화려한 삶을 자랑하려 애쓰고 서로의 연봉과 워라밸을 비교하고 저울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러한 인정투쟁의 결과로,

노예는 패배자, 주인은 승리자가 된다. 


주인은 노예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으며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산다. 명예와 존경은 그 전리품이다. 절대 다수인 소시민은 그런 부유층, 우리가 주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부러워하며 매슬로의 4단계의 벽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헤겔은 이 노예와 주인 관계를 뒤집는다. 


주인이 받는 존경과 명예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노예들에게서 온다. 



바꿔 말해, 

노예의 인정과 부러움이 없으면 주인은 더 이상 주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당당하게 주체성을 획득한 듯 보이는 주인이야말로 철저하게 노예에게 종속된 존재인 것이다. 

반대로 패배한 듯 보이는 노예는 거친 현실과 맞닥트려 살아남기 애쓰는 과정에서, 

자기 주체성과 힘을 획득한다. 


노동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은 과거나 지금이나 노예, 평민들의 일이었다.

주인, 즉 왕이나 귀족, 양반은 노예의 노동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주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철저하게 노예에게 종속되고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헤겔이 볼 때, 

진정 자아를 실현하고 인정 투쟁에서 승리하고 그 예속에서 벗어난 자는 노예인 것이다. 

삶의 고난과 역경에 맞서, 신성한 노동을 통해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을 가진 자는 노예다.

 타자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센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리고 겁이 많은 여자아이에 불과했던 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주체성을 획득한다. 


탐욕으로 인해 부모가 돼지가 된 후,

혼자 남겨진 센은 요괴들이 운영하는 온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처음에 모든 게 어설펐던 셀은 고된 노동 속에서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켜 나간다. 저주로 본모습을 잃은 하쿠를 돕고, 과잉보호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혼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유바바의 아들도 방 밖으로 끌어내 자기 힘으로 걷게 한다. 가짜 금으로 손님들을 유혹해 잡아먹던 가오나시의 탐욕도 고치고, 부모도 정상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굶지 않기 위해 하는 노동은 부끄러운 것도 소외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은 오직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타자화가 아닌 세상과 있는 그대로의 관계를 맺는 건강한 방식이다.         

주인은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을 향유하고 소비할 뿐, 무엇 하나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해내지 못한다. 


역사는 이렇게 노예와 주인의 힘의 관계가 뒤바뀌는 역설에 의해 이뤄져 왔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주어지는 완벽한 삶이 주어진 사람들, 

세상과 부대끼며 제대로 된 일도 한번 해보지 않고, 

고난과 역경을 겪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가 되었을 것인가?


모든 걸 타인에게 의존하고 타자의 인정과 도움을 갈구하는, 진정한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매일 일을 하고 있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한다. 


알은, 그렇게 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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