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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Nov 09. 2023

고독한 책은 위험하다

읽고 쓰다

지난달 말에 <시사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도서관들이 금서 전쟁에 휘말렸다는 기사였다. (참고: 김영화 기자, “도서관은 어떻게 ‘금서 전쟁’에 휘말렸나”, <시사IN>, 2023. 10. 24. pp.56~59.)     


문제의 서적들은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나다움 어린이책’과 거의 동일하며, 그 책들에 대해 열람 제한 및 도서 폐기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은 보수 성향의 단체들이었다. 해당 단체들은 차별금지법과 학생인권조례에도 반대하고 있다고 하니 정치적 성향이 어떤 단체인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책이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내가 가입했던 어떤 단체에서는 리더가 나에게 모임 시설에 책을 가져다 두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왜냐하면 책은 유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반문할 것이다. ‘특정’ 책이 유해하다는 말이지 책 자체가 유해하다는 게 아니지 않느냐? 앞의 단체들 또한 특정 책을 유해하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 좋은 지적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책만으로는’ 모든 책이 유해하다. 즉, 숨어서 읽는 모든 책은 유해하다.     


보수단체가 나다움 책들을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에는 그 책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구어화’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들은 그 책을 숨어서 봐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다움 어린이책이 전혀 유해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어린이들과도 성과 성적 취향,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보수단체의 학부모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그 정도로 뻔뻔할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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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책이 유해하다고 주장한 유명한 분이 계시다.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책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이유에서 문자 언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문자는 ‘죽은 언어’라고 생각했다. 교육의 핵심은 문답식 대화 프로세스에 있는데, 문자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문자는 실재로 오인될 수 있어서 위험했다. 문자는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느낌을 주어 사람들을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런 느낌은 공허한 자만심만 낳게 되어 어떤 공헌도 하지 못한다.      


둘째 문자는 기억을 파괴한다. 암기력이 중요한 시대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접어두고 보면, 이 주장은 사실이다. 요즘은 책과 서적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생기면서 디지털 치매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웬만한 전화번호를 외우던 지난 시대 사람들의 기억력도 대단하다고 생각되는데, 서사시를 외워서 읊던 호메로스 시대의 기억력에는 입이 떡 벌어진다.      


셋째 언어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된다. “글은 적절한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위험했다. 소크라테스는 지도하는 사람 없이 습득하는 지식을 경계했다. (참고: 매리얼 울프, 『책 읽는 뇌』, 살림출판사, 2017. pp.103~115.)     


소크라테스의 의견은 문자가 널리 보급되기 전이기 때문에, 지나친 걱정에 불과했던 부분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혼자서 습득한 지식은 위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요즘 도서관을 상대로 금서 전쟁 중인 보수 성향의 사람들처럼 책들을 폐기하거나 창고에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들을 전면에 내세운 독서 토론회가 열려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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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AI 생성기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매우 뜨거웠을 때, 앞으로의 교육 현장에서 인간 선생을 AI가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AI가 인간의 교육을 완전히 대체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믿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과 소통하며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 이미 부족한 자원이라는 환경을 강제 당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나의 부모는 자신들의 처지에서는 과분한 것을 나에게 투자하고 있다고 자주 윽박지르곤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매우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었다.      


어떤 환경이 풍족한지 가난한지 따질 때 그 척도는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가 서로 불화하고, 사회·문화적 지식의 습득에 무능하며, 이웃을 보는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자식은 자연히 그러한 토양이 주는 한정된 영양분만을 습득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을 보고 배운다. 붓이 먹물을 머금듯이 주변의 생활을 모방하여 익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런 본능을 수행하는 신경 회로를 발견하고 ‘거울 뉴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내가 주어진 환경보다는 조금 더(그래 봐야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서관 덕분이었다. 나를 키운 8할은 도서관의 책들이다. 그러나 내게는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지,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 해석을 나의 삶과 또 다른 책의 해석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고, 읽은 것의 대부분을 잊었다.  


나를 키운 지역 도서관은 지금 그 자리에 없다. 지금은 아주 규모가 커져서 이사를 갔다. 나의 중고교 시절에는 규모가 작았고 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슬픔과 답답함이 치밀 때마다 도서관에 가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그 이유에 도서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도 한몫했던 것 같다.     


도서관은 작았지만, 책은 제법 많이 있었다. 공간이 비좁으니 서가가 촘촘했다. 고전도 있었고 장르 소설도 있었고 유사 과학 서적도 있었다. 심지어 번역본 통속 연애 소설도 있었다. 통속 연애 소설의 경우에는 아마 사서들이 책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입고했던 것 같다.      


내가 살던 고장은 끔찍할 만큼 보수적인 곳이었다. 유생들이 1년에 한 번 공식적으로 제례를 지내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떤 ‘어른 취향’의 어른이 희망도서 신청을 했고, 책의 제목과 이름만 보고 사서가 내용을 잘 모른 채로 구입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할리퀸 시리즈 같은 것은 도서관에 입고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누군가 덕분에 나는 어른 남녀가 할 수 있는 갖가지 육체적 애정 행위를 하는 서양 미남 미녀를 활자로 구경할 수 있었다.      


유사 과학 서적 역시 내게 위험했던 책 중 하나였다. 그 책들로 습득한 지식은 또래 집단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교 시절에 나는 한때 ‘인상학’이라는 관상과 골상학 기타 잡다한 출처 불분명한 지식이 뒤섞인 책들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그 무렵에 나는 책 속의 지식으로 아이들의 얼굴에서 운명을 찾아내거나 건강상의 취약한 부분을 찾아 주었다. 아이들은 나의 엉터리 지식을 꽤 신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에게는 지식의 출처와 신빙성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고, 또래끼리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즐거웠던 것이 아닐까?     


내가 프랑스 고전인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을 읽은 곳도 그 작고 낡은 도서관이었다. 나는 그때 그게 고전인 줄도 모르고 읽었다. 미국 통속연애소설과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읽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에 걸맞는 행동을 했다. 그것을 읽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내게 그것이 프랑스 고전이라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죽이게 웃긴’ 책을 찾아냈다고 믿었고, 이 사실을 어른들이 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훗날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보다가 블랙홀 이름이 너무 낯익다는 생각을 한 후, 킵 손이 쓴 <인터스텔라의 과학>이라는 책을 보다가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때 왜 그렇게 억울했는지 모르겠다. 가르강튀아가 서구 지식인들이라면 모두 아는 고전 풍자소설이라는 사실을 오래전에 알았다면 읽은 척을 좀 하며 다닐 걸.     


교복을 입던 시절에 나의 독서생활을 가이드한 것은 서가의 나무 선반과 나무 칸막이들뿐이었다. 선택의 기준은 무릎을 굽힐 것인가, 까치발을 들 것인가, 책등이 예쁜가, 제목이 나를 잡아끄는가… 그 정도에 불과했다. 대체로 슬플 때는 아랫단의 책을 봤다. 쪼그리고 앉아야 보이는 것들을 찾아내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낮은 곳에 있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내가 책에서 얻어낸 것은 항상 그 정도였다. 나는 책을 껍데기만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이 나쁜 것은 사람을 정보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고귀한 품성으로부터도 소외시킨다. 편협하고 비사교적인 면이 어린 내게 꽤 크게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책은 거울이 아니다. 책은 읽고 있는 사람의 반성을 감춘다. 읽는 사람은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기 마련이다.     


책을 나처럼 읽으면 20년을 읽어도 발전이 없다. 나이 마흔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다시 하며 깨달았다. 책을 골방에서 읽는 일은 반쪽짜리 그림을 자꾸 사들이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림의 나머지 반이 없지만, 한눈을 감고 자위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런 이유로 도서관에는 사람이 책을 들고 만나는 문화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 전달의 AI 로봇이 아니다. 지식을 피부로 습득하게 해줄 좋은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배우고자 하는 어른에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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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생성기의 등장으로 인간 능력의 중요도가 또 한 번 바뀌었다고 한다. 이제는 지식 습득에서 창조성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이다.      


질문을 잘해야 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이란 것이 뭘까?     


이전 시대에는 ‘중도’가 지성의 척도가 되었고, 지식인의 품성으로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AI 생성기에게 아무 질문이나 해 보라. 그 기계만큼 중도의 변을 잘 구현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정치색이 거의 없는 중도의 입장을 고수하는 답변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해댄다. 더는 보편과 균형감각이 인간 고유의 능력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보편과 평균을 산출하는 것은 오히려 기계의 몫이 되었다.     


진보란 무엇일까? 인간이 기계에게 옳고 그름의 판단 주체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있으려면, 기계에게 제대로 질문하여 유용한 답을 얻어내려면,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를 교육해야 하는 것일까?     


도서관을 상대로 금서 전쟁이나 일으켜서는 진보 근처에도 못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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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다작, 다상량이란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시인 구양수가 한 말이라는데, 원래 문장은 조금 달랐다고는 하나, 상량(商量)이란 말은 같았던 모양이다. 대개 이 문구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해석된다.      


얼마 전에 이 문구에 대한 다른 해석을 알게 되었다. 상량이 중국어로는 ‘상의하다, 토의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참고: https://m.blog.naver.com/chiga/220629110290)     


중국 사람이 한 말이니 중국어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게다가 혼자 읽고 혼자 쓰고 혼자 생각해 봐야 얼마나 멀리 가겠는가? 읽고 썼으면 쓴 것을 들고 나가서 두루 묻고 의견을 듣는 것이 맞다. 대개 이런 행동을 학자들이 한다. 지금도 여러 학문 분야의 학자들은 학술회를 개최하고 서로의 읽은 것, 서로의 저작물을 들고 와 토의하고 생각을 나눈다. 아카데미의 폐해를 지적하는 소리도 있지만, 이런 학술교류의 장으로서는 여전히 아카데미만큼 잘 기능하고 있는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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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모두 위험하다. 문을 닫고 책과만 대화하면 극히 위험하다. 책을 들고 사람을 만나야 덜 위험하다.   

   

과도한 고독은 사람의 정서를 피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편협하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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