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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Feb 10. 2024

<보이 후드>와 결말의 공포(주의:스포 포함)

살고 쓰다

12년간 1년에 일주일씩 작업해 주인공이 실제 자라나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 <보이 후드>

아니, 이 철지난 영화를 왜 갑자기 들고 나왔지?

구독 알람을 설정해 두신 분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글쎄, 나도 이 영화를 왜 봤는지 모르겠다. 나의 시댁은 제사를 안 지내는 데다가 명절 행사는 "너희들 편한 시간에 왔다 가렴. 밥만 한 끼 먹고 가." 라는 태도이신데, 이틀 전부터 근거도 발단도 없는 명절증후군 같은 것이 생기더니 책도 안 읽히고 글도 안 써지고, 커피를 마셔도 계속 졸리기만 하고, 그러다가 영화나 봐야겠다 하는 기분이 되었다. (어쩌면 성장기 내내 나를 지배한 명절증후군이 몸에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종갓집 장녀로 태어났다.)


그런 기분이 생산된 보다 직접적인 경로를 서술하자면 이러하다. 생산적인 일에 몰두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면 대개가 그러하듯이 나는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 릴스 같은 것에 코를 박고 있던 중이었는데, 알고리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동진 평론가가 유퀴즈에 출연했던 영상을 추천했다. 그래서 그 회차를 다 보고 두 편의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하나는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또 하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라는 영화였다. 둘 다 사람의 생애 중 특정 시기를 압축적으로 회고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작품을 힐링용으로 선택했다. 영화 마케팅에 동원된 모든 언어들이 충분히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자면, 망했다.


먼저 <원더풀 라이프>를 말하자면, 차라리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봤을 때의 기분이 이보다는 덜 찝찝했던 것 같다. 마지막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나올 때,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짝사랑하던 남자의 소중한 기억을 찾아주고(심지어 그는 1920년대 생이다. 죽을 때 모습 그대로라서 젊은 남자일 뿐이다.) 자신이 그 남자의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 장면 직전에 매니저 같은 역할의 남성 직원이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했기 때문이다. 여자 직원에게는 성적 대화를 노골적으로 하는 고객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허풍' 같은 것일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장면 하나 때문에 나의 모든 직장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허풍으로 삼든 어쨌든 그런 고객을 트라우마 없이 넘길 수 있는 여직원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그녀가 감정노동자로 종사하기 시작했다는 점, 여성 감정노동자에게는 성적 수치심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넘길 줄 아는 '유도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헛웃음이 나왔다.


힐링을 하려다가 졸지에 트라우마만 자극을 받았다.


다음 영화는 더했다. <원더풀 라이프>의 내상을 씻으려고 <보이후드>를 보았는데, 이것 또한 결말이 치명타였다.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이 매우 섬세하다. 감독의 전작을 보니 그럴 법도 했다. 내가 애정해 마지 않던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의 감독이었다. 섬세한 연출력의 증거로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결말부에서 어머니는 예전에 자신이 한 가벼운 어떤 행동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으로부터 '은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 않다. 허탈하고 슬픈 표정이었다. 그 자리는 그녀가 자기 아이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식사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홀가분해지고 싶다며 아이들에게 독립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던 중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다음 장면에서 오열했다. 짐을 싸서 나가는 아들에게 이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인생에 남은 것이 없다고, 이렇게 쉽게 모두 떠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울었다. 그 장면에서 나도 울었다. 합리적 이성으로 보면 "미친년인가?" 싶을 정도로 손바닥 뒤집는 행동이지만, 그 양가감정은 충분히 그럴 만한 것이었다. 혼자 두 아이를 감당하며, 세 번의 결혼에서 폭력을 당하고 짓이겨지며, 그러는 동안에도 직업적 자기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했던 여자라면, 그래도 되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고맙다는 칭찬보다는 원망과 호소를 더 많이 듣게 되는 일이다. <보이후드>라는 픽션 속에서 그녀는 12년간 '비현실적으로' 강인하고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을 나쁜 계부들이라는 위험에 빠지게 한 것은 그녀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랑에 빠질 때 하는 행동으로 어떻게 미래의 그 남자 모습을 예견하겠는가?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린 것과 대조적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들 곁에 서서 십대 시절의 연애와 사랑에 대해 조언해준다. 그 또한 좋은 아버지였다.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데려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준다. 그리고 아이들과 대화하고 싶어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한다.


내가 목격한 한국사회의 남자들, 결혼을 망가뜨린 남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서구보다 이혼이 쉽지 않기에 이혼한 남자들이 그 정도로 엉망일 수 있다. 오죽하면 우리에게는 '졸혼'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겠는가? 쇼윈도 부부도 아니고, 남들에게 실질적 파탄을 뻔히 공개하면서 살아가겠다니. 뒤집어 보면 그렇게라도 이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단어이다.


아무튼 이 아버지는 두 아이를 엄마에게 떠맡기고 떠날 때는 거의 보헤미안이었는데, 두번째 결혼 후 늦둥이를 낳고 사람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사랑은 타이밍이야. 나를 봐. 드디어 너희 엄마가 그렇게 원하던 쫌생이가 되었어."


그러자 아들이 되묻는다.


"엄마가 20년만 참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거죠?"(주의: 기억력에 의존해 재구성한 대사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웃는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남성 연대는 "알지? 너도 이제 남자. 우리끼리 크로스." 분위기로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니, 20년을 참으라고? 돈도 안 벌어오고 기타를 둥땅거리면서 아들 데리고 캠핑 갈 생각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게다가 초반부의 행동은 그의 자기중심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줄 시간과 방법을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는 밀어붙이는 모습이 흔하디 흔한 '자기중심적 배려'를 실천하는 남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하아... 왜 물어보고 해야 할 일은 묻지 않고, 묻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꼬치꼬치 묻는 거니... 우리네 대한민국 녀성들은 저러한 남성과 이혼하지 않습니다. 그냥 참고 삽니다.) 아마 그 남자를 20년 간 참아낸 평행우주의 그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여성이라면 울화통이 터져서 '졸혼'을 선언하고 남자를 내쫓을 '타이밍'이 드디어 도래할 시점이다.


종합하면 이 영화의 결말은 이러하다. 12년간 주인공 남매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운 어머니는 앞뒤 안 맞는 오열을 하고, 애들을 주말에만 만나 생색을 낸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가르침과 깨달음을 준다.


이 영화가 나쁜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잘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는 <걸 후드>가 아니고 <보이 후드>이므로. '보이'의 시선에 맞춘 12년간의 성장 서사가 유려했고, 그러면서도 편협한 세계관이나 극단적 선악관에 빠지지 않으려고 선을 잘 타고 넘었다.


문제는 영화가 아닐지도 몰랐다. 관람객인 나의 특수성이 문제인지도. 내가 아들만 낳은 엄마이기에 영화의 결말에서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 공포는 형언하기에는 아주 미묘한 부분이 있지만, 뼈다귀를 추려내면 아마 이런 언어가 되지 싶다.


아하, 그렇구나. 나는 언젠가 이해받지 못하는 미친년이 거고,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와 크로스하겠구나.


아...... 나, 왜 봤지? <보이 후드>를 명절증후군 극복용으로 보려는 기혼 여성에게는 비추한다.


여기서 오해 방지용 언급을 하나 해야겠다. 둘 다 썩 잘 만든 영화이고, 잔잔하게 힐링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 충분히 추천할 만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원더풀 라이프>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20대의 첫사랑에 목매는 여자들 캐릭터에 공감이 전혀 안 되었던지라...), <보이후드>는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다른 날 다른 마음가짐일 때 보면 감상이 달라질 듯도 하다. 무엇보다 귀여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이 힐링 그 자체이다. 더구나 그 모습이 실제 배우의 성장이기에 1년씩 성장해 변할 때마다 '아이고, 많이 컸네. 예뻐라.'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퇴고하려고 읽어 보니 영화를 왕창 스포해 버렸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기차를 놓친 뒤의 플랫폼에서 맞는 찬바람 같은 소리겠지. 그러니까 이왕 스포한 거 크게 한 방 더 스포하고 맺으련다.


영화의 마지막에 자못 훌륭한 대사가 나온다. (요점만 추려서 의역한 것)


"순간을 잡아라는 말 자주 듣잖아. 그런데 반대인 것 같아.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순간이란 건 지금을 말하는 거니까."


순간에 붙들려 있는 사람의 인생.


이 대사들은 유퀴즈에서 이동진이 한 말로 연결된다. "미래는 알 수 없잖아요. 계획을 세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 성실히 사는 것, 그것은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는 이와 비슷했던 말)


순간에 충실하다는 것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오늘만 즐기는 태도가 아니라, 순간의 조건에 맞추어 성실히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순간의 손아귀에 놓였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렇다고 이 순간을 너무 미래의 희생양으로 삼지는 말자. 어차피 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장기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

먼훗날, 순간을 살아온 내 인생의 결과물이 나 혼자만의 몫으로 오롯이 남겨진 고독일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왜냐하면 사람의 일생은 결국 그렇게 되므로. 개별의 고유한 삶들이 결국은 보편으로 수렴되고 말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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