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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Jun 08. 2024

사랑이 끝나갈 때

살고 쓰다

아침과 저녁, 약을 세 봉지씩 챙긴다. 하나는 나의 것, 둘은 너의 것이다. 너는 약을 잘 먹지 않는다. 알약은 무른 음식 조각 속에 밀어넣어 주어야 하고, 가루약은 가루가 잘 녹도록 음식에 고루 섞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약을 먹는다. 한 봉지 속에 든 네 개의 알약이다. 항생제, 위장약, 가려움증 저하제 같은 것들이다. 


나는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으며 네가 나으면 나도 나을 거라 믿는다. 우리의 아픔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네가 낫지 않으면 나도 낫지 않는다. 


이것은 전염병과는 조금 다르다. 전염병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옮아가고 잠복기를 거쳐 서로 다른 병의 경과를 겪는다. 하나가 낫는다고 다른 하나가 낫는 게 아니다. 하나가 나은 후에 안도한 순간, 다른 하나가 아플 수도 있다. 전염은 그런 것이다. 그 사이에는 세균과 바이러스가 끼어들어 있다. 전염에는 복잡한 관계들이 관여해 있다. 


우리의 관계는 보다 단순하다. 우리 사이에는 각자의 면역 체계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너의 피부병에서 떨어진 각질들이 내 면역 체계를 자극해서 나의 피부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너는 수술 후유증과 온갖 질환들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피부병에 잘 걸리고 쉽게 낫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나는 네가 버거울 때가 있다. 잠들기 전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목을 긁어댈 때나, 자고 일어나 눈꼬리가 짓물러 눈이 잘 떠지지 않을 때, 무심코 입을 벌리다가 입꼬리의 상처가 벌어지며 화끈댈 때, 이 아픔이 언제 나을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해질 때, 나는 너를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구체적으로 너를 포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다가 그만둔다. 너를 어디에 두고 오더라도 그건 너에게 최선은 아닐 것이다. 너는 낯선 곳에서 힘들어 할 것이다. 너를 내 면역체계가 반응하지 않는 곳에 떼어놓는 일은 나의 피부병에 대한 최선의 대책일 뿐이다. 그래서 2주간 의사의 조언을 묵묵히 무시했다. 


의사는 너를 '다른 곳'에 보내기를 조언했다. 그는 인간 문화 안에서 활동하는 피부과 전문의로 인간의 입장에서 질병과 세계를 파악한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그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따를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환기를 자주 시키는 것, 청소를 자주 하는 것, 네 곁에 눕지 않는 것, 네 목욕을 직접 시키지 않는 것 등이다. 


너도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피부병 때문에 피하지만, 너는 나를 디스크 때문에 피한다. 디스크는 전염이 되는 것도, 면역계에 연관된 질환도 아닌데 어째서 우리 둘은 디스크까지 닮아 있는 것일까? 내가 먼저 앓기 시작한 디스크가 왜 너에게서 나타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이상하고 신비롭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또 있다. 너희들은 어째서 디스크가 있으면 사람을 피하는 것일까? 사람의 빠른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조차 멀찌기 떨어져서 보고 있는 네가 낯설게 느껴진다. 


한때 우리는 서로의 신체를 어느 한곳이나마 붙이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이였는데, 내가 너를 만지면 너도 나를 핥고, 내가 바닥에 몸을 눕히면 너는 내 몸이 만든 곡선 안쪽에 자리를 잡는 사이였는데, 이제 우리는 서로를 피하는 사이가 되었다. 너는 항상 내가 있는 곳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가만히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풀쩍 일어난다. 그러다가 특정한 각도로 목이 돌아가면 비명을 지른다. 그게 네 목의 디스크 때문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내가 너를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겁을 낸다.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으르렁댄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어제는 너에게 안약을 넣어주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썼다. 며칠째 으르렁대는 너를 붙들고 강제로 안약을 넣었다. 물려서 그만둔 적도 있고 정말 물려는 기세에 눌려 그만둔 적도 있다. 이런 식으로 너는 나날이 네 방법-화를 내고 위협하는 것을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너의 목을 붙잡고 버텼다. 너는 목을 붙들렸다는 자체가 불안하고 화가 나서 나를 공격했다. 나는 너의 송곳니를 피하면서 버텼다. 네 목을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디스크를 악화시킬까봐 힘껏 아래로 누르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위치에서 버티느라 나 역시 너무 힘들었다. 


드디어 네가 기운이 빠지고 숨소리가 조용해지고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네 목을 쥔 손을 가볍게 움직여 마사지를 해 주었다. 너는 이제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너는 내 손길이 아픔을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다른 손으로 네 눈주위를 닦고 목덜미를 닦아도 저항하지 않는다. 


너에게 내가 아픔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느라 나는 녹초가 되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20분을 보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이렇게 해내가야 하는 것일까?


한때 네가 나를 떠나리라 믿을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네가 나보다 빠르게 늙음에 도달하고 죽음에 입성하리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믿을 수 있다. 실감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이별을 앞두고 서서히 우리 둘을 갈라놓는 느낌이다. 오래된 연인이 이별할 때처럼, 우리는 서로 멀어지는 절차 속에 있다. 병으로 서로를 부담스러워하게 되고, 내 아픔으로 상대의 아픔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게 되고, 마음이 조금씩 떠나다가 육신을 떠나보내게 되겠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게 되는 걸까? 그런게 사랑인 걸까?


산책마저 금지 당한 네가 불편한 자세로 방석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다가 서재로 와서 글을 쓴다. 너는 예전처럼 나를 따라오지 않는다. 나도 네가 따라오지 않는 편이 좋다. 잘 움직이지 않는 뒷다리로 비틀거리며 따라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다.  


한때는 너와 달린 적도 있었는데, 네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지 못하고 뒤따라가지 못해서 간식을 들고 콜백 훈련을 시킨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집 안에서조차 너는 나를 따라잡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꿈에서라도 잠깐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딸칵, 리드줄의 걸쇠를 풀면 너는 자세를 낮추고 있다가 스프링처럼 튀어나간다. 나는 너를 부르며 뒤따르지만 너는 나를 약올리듯이 오른쪽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질주한다. 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콜백 훈련이 잘 되었나 확인해 보고 너는 귀를 쫑긋거린 후 내 쪽을 돌아본다. 네가 크게 한 번 짖고는 다시 달린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괜찮아. 천천히 따라와. 내가 앞장서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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