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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Jun 21. 2024

개소리의 개, Bullshit의 shit

읽고 쓰다

AI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현상을 가리켜 '환각(hallucinations)'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관련기사 하단 링크 첨부). 영국 글래스고우대학(University of Glasgow)의 연구진들은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의 저작 《On Bullshit》의 논증을 근거로 AI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Bullshit'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의 임지선 기자는 'Bullshit'을 '헛소리'라고 번역했다. 참으로 점잖은 단어 선택이기는 하지만 본질에서 살짝 비켜났다고 볼 수 있다.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간행한 한국어 번역판의 역자이신 이 윤 선생께서도 용어의 문제를 숙고하신 모양인데, 그 고충은 옮긴이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Bullshit은 사전적으로 헛소리, 허튼소리, 엉터리, 실없는 소리, 허튼 수작, 허풍, 과장, 바보 같은 소리, 터무니없는 소리 등으로 번역된다. 2015년도 서울대학교 논술 지문에서는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해 실으면서 '빈말'로 번역하였고, 철학 명저를 요약 소개한 책 《짧고 깊은 철학50》(흐름출판, 2014)에서는 '헛소리'로 번역한 바 있다. 역자도 처음에는 개소리라는 비속어보다는 헛소리 정도로 옮기는 게 좀 더 철학책의 격에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했을 때의 난센스와 차별화가 어렵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또한 헛소리에는 무의미한 말이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Bullshit은 무의미한 말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었다. Bullshit에는 화자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이기 때문에 이를 무의미한 말로 옮기는 것은 어딘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정적인 것은 이 책이 뉴욕타임지 베스트셀러로 실렸을 때 도서명이 'On Bull____'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Bullshit의 번역어는 지면에 싣기에 부적절한 단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비속어 느낌이 들도록 '개소리'로 번역하게 되었다. pp.70-71.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헛소리'를 검색하면 3가지 의미가 나온다.

[1]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

[2]잠결이나 술김에 하는 말.

[3]앓는 사람이 정신을 잃고 중얼거리는 말.

비슷한 말로 '군소리'가 제시된다. 군소리를 검색해도 [2]와 [3]의 의미가 제시되는데, 주의미인 '하지 아니하여도 좋을 쓸데없는 말'은 헛소리의 주의미인 '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과 의미장이 겹쳐 있다. 해롭지는 않지만 '실속'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술에 취하거나 잠에 취한 사람, 병중에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이런 이미지는 때로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개소리'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


이 한 줄의 정의 속에는 애잔함이 끼어들 틈이 없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취하지 않았으며 병을 앓고 있지도 않다. 그는 매우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으며, 그 말이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충분히 예상하고 예측할 수 있다.


AI가 '환각'을 경험하고 있다면 당연히 '헛소리'도 할 것이다. 그러나 AI에게 직접 느낄 감각 따위는 없고 학습된 전기 반응이 인간의 언어를 흉내내 인간 감각을 교란시키는 중이라면 그것은 '개소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AI가 헛소리를 하는 중이라면 일말의 애잔함이나마 느낄 수 있을 테지만, 개소리를 하는 중이라면 응당 화가 나야 한다. AI가 헛소리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기술애호가(technophilia)에 가까울 테고 더 나아가 사물성애자(objectophilia)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AI가 개소리를 지껄인다고 보는 사람은 기술혐오자(technophobia)까지는 아니더라도, 로봇개 '아이보'를 데리고 신사를 참배하는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관련 기사 하단 첨부).


작고 깜찍하다 못해 판타지스러운 판형의 책 《개소리에 대하여》


프랭크퍼트의 짧은 저작물에서는(대단히 짧지만 대단히 압축적이다.) Bullshit의 의미장을 추적하기 위해 Bull과 Shit을 따로 떼어놓고 분석한다. 프랭크퍼트의 분석은 영어를 대상으로 했으므로 이 지면에 옮기지 않겠다. 나는 좀 더 창의적인 글을 써 보려 한다. 프랭크퍼트의 방법을 빌려 우리말의 '개소리'와 서양의 소똥(bullshit)에 필적하는 '개똥'에 대해 말하고 싶다.


먼저 접두사 '개-'로 말할 것 같으면, 영어의 Bull이 '남성'이나 '남성성'을 포함하는 것과 다르게 성별 중립적인 단어로서 어느 성에게나 동등한 모멸감을 선사한다. '놈'이나 '년'과도 잘 결합할 뿐더러 '자식'이나 '새끼' 같은 성별 중립어와 붙여도 어색함이 없다. 물론 결합 이후에는 성별에 따른 대상의 빈도가 달라지기는 한다(국립국어대사전에서는 개와 결합한 '자식'과 '새끼'가 주로 남성을 일컫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성을 해당 비속어로 불러서 안 될 이유는 없다. 그것은 개가 결합한 '년'의 문제와는 다르다.).


위의 경우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상 '[3](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에 해당하는데 예문으로 '개잡놈', '개망나니'를 들고 있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 저런 비속어가 '정도가 심한'을 뜻하는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잡놈이나 망나니의 정도가 심해져서 개잡놈과 개망나니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식과 결합해 '정도가 심한 자식'이 되면 어째서 욕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개금, 개꿀, 개떡, 개먹, 개살구, 개철쭉'을 예로 든 첫 번째 의미장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위의 의미에 의하면 개놈이나 개자식은 '질이 떨어지는' 혹은 '흡사하지만 그보다 못한' 놈이나 자식이 되므로 상당히 치욕적인 뜻이라 할 수 있다. 더하여 '개떡 같네'처럼 '질이 떨어지는'의 뜻이 욕으로 쓰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개소리'그곳에 약간의 지분을 둘 수 있다. 


사실 '개소리'는 사전상 다음 의미 범주에 해당된다.

[2](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위에 해당하는 용례로는 '개꿈, 개나발, 개수작' 등이 있는데, 이곳이 '개소리'를 위해 만들어진 지정석일 것이다. 이곳에 '개소리'가 자리잡으면 프랭크퍼트가 말한 '개수작bullshit'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장인 정신을 담아 사려 깊고 엄격한 자기 규율을 지키는 대신,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언행들을 개소리라 할 수 있다.


영어와 달리 우리말의 '개-' 속에는 프랭크퍼트가 말한 Bull과 Shit의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프랭크퍼트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빌려 Bull에 "불필요한, 틀에 박힌 일상 업무 또는 의식절차"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Bullshit은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유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개-'의 국어사전 정의에서 [2]와 일치한다. shit의 경우에는 좀 더 긴 인용이 필요하다.

프랭크퍼트가 논증한 shit 부분을 살펴보자.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이 어떤 면에서 개소리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그럴까? 개소리 자체가 항상 부주의하게 혹은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점, 개소리는 결코 세심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 개소리를 지어낼 때 롱펠로가 넌지시 말했던 저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비슷한가?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천성이 별생각이 없는 멍청이인가? 그의 생산물은 언제나 너절하고 조야한가? '똥shit'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렇다는 걸 암시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엉겨 붙은 모양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pp.25.-26.


더운 공기(hot air)와 대변(shit)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더운 공기를 특히 소똥bullshit에 어울리는 동의어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운 공기가 모든 정보성 알맹이가 빠진 말인 것처럼, 대변은 영양가 있는 모든 게 제거된 물질이다.  pp.45-46.


위의 설명은 어쩐지 '개-'의[1]의미를 연상시킨다. '개떡' 같은 소리들, 즉 대충 주물러 만든 이야기들은 서양의 소똥과 모양이 비슷하다. 게다가 인공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소똥과 '개-'를 붙인 야생의 생명체들은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우리 정서로는 아래의 설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이는 '변'에 대한 농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그렇지 않은 문화권 간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대변은 영양분의 시체, 음식에서 필수 요소가 빠져나가고 남은 것으로 간주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변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재현이다.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대변을 어쩔 없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가 대변을 그토록 혐오스러워 하는 죽음을 너무도 친숙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변은 자양분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없다. 마치 더운 공기가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없는 것처럼. pp.45-46.


대변이 자양분이라는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단지 일차적 섭취물에 한해서 그렇다. 대변을 보며 '죽음'을 떠올리는 연상은 어쩐지 어색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대변은 다음 이미지와 더 가깝다.


권정생, 정승각의 역작 《강아지똥》, 주인공보다 주인공이 내뿜는 훈기에 집중한 작화가 돋보인다.


사실 우리 문화에서 '소똥'은 어감상 비속어로서의 날카로움이 떨어지는 말이다. '개똥' 정도는 되어야 비속어로서 당당한 날카로움을 뽐낼 수 있다. '소똥 같은 소리'는 어쩐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지만, '개똥 같은 소리'에서는 직관적으로 언어 공격을 감지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방어로 주먹을 내지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나의 졸고 <운다고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수록)에서 나는 '똥'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사용하여 '생산물'에 대한 비유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다음 인용문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나의 '똥'은 프랭크퍼트의 shit과 비슷하면서도 상반되는 면을 보이고 있다.          


내 경우에 쓰기 욕망은 식욕 같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높은 차원의 자아실현 욕구 같은 것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많이 먹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는 화장실 욕구와 비슷하다.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한두 줄이라도 써두는 일을 반복하면 내장이 꽉 찼을 때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한다. 이 책, 저 책과 대화하고 ‘나는 왜 이런 걸 못 쓸까?’ 울면서 씹어 넘기고 그러다 보면 “잠시만, 너희들끼리 이야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하고 외치게 된다. 시원하게 싸고 나면 다시 시작이다. 또 읽고 대화하고 씹어 삼키고 소화 시키고…….

이 비유는 쓰기의 ‘욕구’에 초점을 둔 것이지만, 그렇게 생산한 글들이 성공적인 ‘작품’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적용 가능하다. 내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말 그대로 ‘똥’일 때가 더 많다. 적어도 생산 직후에는 전부 똥처럼 보인다. 고치면 나아질 때도 있지만 여전히 똥인 채로 내버려져 있는 글이 더 많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서랍에 넣어두고 코를 틀어쥐게 하는 냄새가 좀 가시고 나면 꺼내 본다. p.57.


나의 '똥'은 양분이 빠져나간 후의 '죽음' 상태가 아니다. 공들여 만든 것이 아니라 어쩌다 '싸지른' 것이라는 점에서 프랭크퍼트가 말한 shit과 비슷하지만, 나의 '똥'은 그보다는 훨씬 살아있는 존재다. 진정한 완성형을 위한 '거름'이며 민들레를 위한 강아지똥(그보다 성숙한 형태인 개똥까지 포함하여)이라 할 수 있다. 묵혀 두면 언젠가는 그 위에 꽃이 피는 것이다. 그것은 Bullshit이라기보다는 허튼소리에 가까우며, 허튼소리의 형태를 띤 초고에 가깝다.


여기까지 열심히 읽어주신 독자에게 고백하자면, 이 글은 사실 거의 전부가 '개소리'이다. 헛소리라고 우기며 오늘 아침에 피부과 항히스타민제를 먹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둘러대고 싶지만, 사실은 피부과 약이 다 떨어진 후에 병원에 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결국은 헛소리가 아니라 거짓말이 될 것이다. 에릭 엠블러의 소설 《더러운 이야기》 에서 말하듯 "개소리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다면 거짓말은 안 하는 게 낫다."p.51.


끝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 글이 '진정성 있는 개소리'로 읽히는 것이다. 물론 이 바람은 프랭크퍼트에 논증에 의하면 모순이다. 해당 책에서는 '진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 인용은 《개소리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 (중략)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대 요구되는 규울이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중략)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로 드러났다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옳은 기술과 틀린 기술이 모두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중략) 우리의 본성은 사실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실체가 없다. 다른 사물들에 비해 악명 높을 정도로 덜 안정적이고 덜 본래적이다. 그리고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pp.66-68.


우리 모두(AI까지 포함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정성 넘치는 개소리에 매달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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