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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Dec 17. 2022

붓을 들었다

브런치를 쓰지 않은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인생이 뭐가 그리 바쁜지,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는 게 싫다는 이유로 내 삶을 꽉꽉 채워 넣다 보니 브런치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까마득해졌다.


오늘은 몇 년 만에 그림을 그린 날이다.

미술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이 나거나 마음이 헛헛할 때 자주 그림으로 풀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술재료들이 터질 듯이 들어있는 서랍은 꽁꽁 닫혀있다.


나무를 abstract 하게 풀어내는 동안 내 머릿속에 가득 찬 많은 생각들을 이곳에 푼다.


화려한 줄로만 안다. 

화려하겠지.

뉴욕 맨해튼에서 살고, 디자이너에, 키가 있는 탓에 꾸미고 나가면 한 번씩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는 거 알고 있다. 유럽 여행도 종종 가고, 편하게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며, 깨끗한 곳에 묵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누군가가 보면 모두 배부른 타령에 불과한 나의 공허함은 나를 평생 키워준 부모님도, 평생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4년 사귄 전 남자 친구도 알지 못했다.


마지막 브런치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Senior Designer로 승진이 됐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승진이 된 터라 부담감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일 스케줄로 인해 밤에 잠도 잘 자지 못 자고 밥도 잘 먹지 못한 탓에 살이 쭉쭉 빠졌다. 그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규모가 조금 더 작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미친 스케줄을 피해 건강을 지키자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회사로 이직을 했다. 시니어로 이직했기에 연봉도 올려 받았고 그 위에 3월에 보너스를 준다는 계약까지 얹어 받았다.


더 이상 박봉 디자이너가 아니다. 나름 알아주는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데로 컬렉션을 꾸릴 수 있어 일에 대한 성취감도 있다. 몸은 건강하고 비주얼도 나름 호감형이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4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어간다.

그가 뉴욕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스타트업을 하겠다고 한국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헤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평생을 함께 하리라 그려왔던 미래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백번을 사랑한다 말해도 한번 사랑하지 않는다 하면 끝나버리는 연인 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4년의 연애를 뒤로하고 그는 6개월 만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한 4년의 시간이 5-6개월 만에 정리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또한 처음 배웠다.

강한 사람이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강한 사람을 원하는 거 같았고, 내 앞에서 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4년 동안 맞춰져 갔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관계가 사실은 그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맞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이 되려 노력한다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남자 친구를 힘들게 하고 있던 것이다.


가을에 엄마랑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워낙 자주 티격태격하는 터라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파리 한복판에서 다투다 나온 "너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거 같은데"이라는 엄마의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4년 동안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 친구는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정도로 내가 의지가 안됐다고 하질 않나, 평생을 나를 제일 잘 알 거라 자부하던 엄마도 내가 꾸며내는 가면만 보는구나 싶으니 이 넓디넓은 세상에 나 혼자 남겨져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감에 차 있지 않다. 

화려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다.

다 내가 만들어내는 façade 일 뿐이다.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한 내가,

도중에 포기하기 싫었고,

내가 내 인생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뉴욕 땅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다.

끊임없이 자기 주문을 외우고 남들이 모르는 노력 끝에 이 자리에 왔는데, 

결국 남은 건 내가 빚어낸 façade 만 있을 뿐, 나의 진짜 모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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