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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 Jan 26. 2021

광고주라서 죄송합니다.

3년 차 대기업 마케터의 변명

나는 광고주다.

SNS 채널 운영 대행사 한 곳은 연간 계약 하에 일 년 내내 지지고 볶고 있고 그 외에도 상품 론칭, 모니터링 업무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대행사들과 광고주-대행사의 관계를 맺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인턴을 제외하고는 첫 직장이 운 좋게도 대기업이었고, 또 평소 희망하던 대로 마케팅 직종에서 일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광고주'로서의 위치가 익숙해지고 편해졌지만, 사실 입사 후 처음 광고주로서 대행사들을 미팅할 때는 이것만큼 세상 어색한 게 없었다.


난 광고홍보학과 학생으로서 대학 내내 광고대행사 입사를 꿈꿔왔고, 쉼 없이 광고 공모전을 했으며, 심지어 인턴도 대행사에서 (6개월씩이나) 박봉에 소처럼 일했던 흔치 않은 뼈속까지 광고인(이라고 생각했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고홍보학과에서 수많은 선배들과 대화하고, 또 대행사에서 인턴으로 광고주와 실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면서 내게 광고주란 존재는... 미련하고 무능력하고 결단력 없는 존재였다.


"아니 크리에이티브 브리프 구체화해서 구체적 크리에이티브 뽑아서 스토리보드 작성해서 보고하고, 업체들 컨택해서 경쟁력 있는 견적 짜고, 스케줄 잡아서 덕션끼고 장소 섭외하고 편집하고 납품까지 우리가 다 하는데 대체 광고주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뭐 하는 거야?"

대행사 모두가 이걸 궁금해했지만 광고주의 무능력 말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사님 조차도...




하지만 제다이의 길을 버리고 시스의 길을 택하며 다크사이드에 눈을 뜬 아나킨 스카이워커 a.k.a 다스베이더처럼 대행사의 길을 버리고 광고주의 길을 택한 난 이제는 안다.


왜 광고주의 대행사 선정 과정은 그렇게 오래 걸리고, 피드백은 제시간에 오는 일이 없으며, 그나마 오는 피드백도 나중엔 본인이 한 피드백 인지도 기억 못 하는지...

대체 왜 자신의 프로젝트임에도 진척 상황 하나 제대로 파악 못해서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설명해줘야 할 정도로 맥락 파악은 못하면서 폰트나 컬러 같은 사소한 요소에 꽂혀서 방향을 이리저리로 흔드는지...


그리고 과연 뭘 하는지...

(물론 무능력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내가 3년 동안 다양한 업무의 광고주 역할을 한 결과, 광고주가 무능력한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정리 가능하다.


1. 동시에 진행하는 업무가 너무 많다.


당신의 광고주가 분명 정상적인 사람이고, 얘기해보면 똑똑하고 능력도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업무에선 '똑똑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게 가장 타당할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속한 팀의 경우 실제 론칭이 들어갈 때는 팀원 대다수가 론칭에 따른 다양한 마케팅 활동들을 분배해서 진행한다. 하지만 이 업무를 시작된다고 해서 원래 본인의 롤에 해당하는 업무 및 기타 제반 업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마케팅팀 지원 업무 특성상 여기저기서 자료 요청 대응하는 건 물론이다)


실제 나의 경우엔 론칭을 앞두고 매주 SNS용 카드 뉴스, 영상 콘텐츠를 레귤러 하게 생산하고, 세금계산서 처리 및 전표 작성 등 관리업무를 하는 동시에 카탈로그 제작을 위해 지방 출장을 다니는 동시에 론칭 영상도 찍었다. 물론 론칭 행사 지원을 위한 행사 제작물 관리 및 피드백은 덤.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고, 당신의 대행사와의 업무가 광고주에게 가장 급한 업무가 아니라면... 미안하게도 회신 메일은 아주... 아~주 늦게 올 수밖에 없다.


2. 뱃사공이 너무 많다.


기술 관련 업무나 회계 관련 업무는 전문 지식이 없다면 이래라저래라 하기 힘들다.

하지만 웃기게도 대부분의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케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라고 생각한다.

한소리 하면서 본인의 위상과 조직에서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아저씨들이 한두 마디씩 던지는 순간 콘텐츠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런 외부요인을 컨트롤하는 게 담당자의 역할이지만, 회사를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자주 발생한다...


콘텐츠 PPM에 본부장님이 판촉 실장, 수출 실장, 국내 사업부장, 그리고 인사팀장까지 PPM 자리에 부를 때 담당자의 심정은... 물론 내 얘기다.


3. (당신은 아니겠지만) 무성의한 대행사가 너무 많다.


광고주의 일을 나의 일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해주는 대행사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대행사도 너무 많다.

특히 비딩 과정에선 그렇게 회신 빠르고 자료 대응도 빠르던 대행사가 계약 이후엔 전화도 받지 않고, 업무 진척도 느려지기 시작할 땐 답답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낄 때도 많다.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일만 제대로 해주면 장땡이다. 프로젝트 끝나고 웃으며 한잔 할 수 있다.

더 최악인 건 같은 시기에 더 큰 프로젝트 들어왔다고 (광고주들도 다 안다) 내 것 대충 해주는 상황이다.

파워포인트 보고자료에 회사명 잘 못쓰는 거 넘어서 로고 잘못 쓰는 경우, 있다.


4. 무능력... 한 담당자가 너무 많다.


2번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대행사 사람들이 의심하는 그대로 무능력한 담당자들이 너무 많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대부분 직무 순환이란 걸 한다. 한 사람이 회사를 다니면서 한 분야만 파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다양한 직무를 수행할 기회를 줌으로써 회사 전반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지만, 바로 이 제도 때문에 마케팅 분야에 대해 일자무식한 사람이 대행사를 컨트롤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실제로 SNS 광고를 운영하면서 CPV, CPC, VTR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마케팅 서적 한번 읽지 않은 사람도 정말 많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과 (썩은) 감대로 대행사를 컨트롤하니 대행사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과물은 구리게 나오고, 이에 따라 평가는 나빠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광고주들도 많다.

그리고 훌륭한 광고주가 훌륭한 대행사를 만든다는 말처럼, 위와 같은 상황이 내게 벌어지는 이유는 아마 '내가 무능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대행사는 대행사 나름의 사정이 있듯이 마냥 편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광고주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핑계를 늘어놓고 싶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메일을 보낸다.


000님, 저희 콘텐츠 초안 27일까지 송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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