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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 Dec 17. 2021

그녀와의 인터뷰

오늘도 같은 레퍼토리다.


"너 어렸을 때 기억나? 밤에 자라는 잠은 안 자고 일어나서 혼자 TV 본다고 뭐라고 했던 거?", "우리 승규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맨날 친구들한테 자랑한다니까"


그 얘기를 듣고 나는 허허 웃는다. 친근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지만 작은 말 조각들은 내 입 주위를 맴돌다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몇 가지 자잘한 집안일을 돕고 나는 다시 그녀 앞에 앉는다. "옛날얘기 해주세요"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을 미뤘던 외할머니댁에 방문했던 어느 날이었다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나의 유년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보호자였던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게 익숙한 모습으로 익숙한 공기의 흐름에서 나와 나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할머니가 나의 어머니에게 건넸을 걱정과 안쓰러움 속에 사랑이 숨어있는 잔소리를 이제는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따뜻하지만 애달픈 대화가 지나고,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어린 시절 잔병치레가 많았던 내게 그녀가 새벽잠을 줄여가며 끓여주던 가장 익숙한 맛이어야 할 곰탕을 한 술 떴고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치매라는 이름의 병을 앓으며 기억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몇 번의 다툼과 서운함, 그리고 논쟁이 지난 후 우리 가족은 망가져 가는 그녀의 생활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히 뭉치게 되었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사는 삼촌은 출근 전후로 틈틈이 그녀를 방문해 안부를 확인했고, 어머니와 이모는 서로 돌아가며 주말마다 그녀의 집을 찾아 청소했고, 물건을 정리했으며 그녀가 입고 먹어야 할 모든 것을 준비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던가? 한 명의 치매 노인을 돌보기 위해선 온 가족이 합심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자랑스러운 팀워크 안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 후로 나는 2주에 한 번, 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젊었을 적에 있었던 일을 물어본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사라져버린 최근의 기억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된 옛날 기억 속의 그녀는 더는 그 어떠한 개성도 함의하지 않는 '할머니'로 정의될 수 없다.


일본 유학 다녀온 부잣집의 복사꽃같이 어여쁜 첫째 딸이고, 말수는 없고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남편을 둔 새댁이며, 친구들의 젊은 어머니보다도 더 아름다운 외모로 어린 손자의 자부심이었던 나의 이상형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남대문 시장에 좌판을 깔아놓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장사를 해야 했던 내 나이 또래의 그녀는 '다 잘될 거야'라는 위로를 건네주고 싶은 한 명의 여자이다.




예전에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졌고 편안해졌고 그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생각하면 여러 맛이 섞인 이름 모를 타국의 열대과일의 맛처럼 슬프기도, 애달프기도, 사랑스럽기도, 그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처음으로 그녀를 나의 '할머니'가 아닌 '허민숙 씨'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이면 나는 또다시 그녀의 집에 방문해 옛날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녀와 나의 이 작은 인터뷰가 부디 길고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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