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이 10개 언어권에서 30만 부가 판매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문학작품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82년생 김지영은 기혼여성들에게는 씁쓸하지만 공감되는 익숙한 명절 스케치에서부터 시작한다. 한 번쯤 안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시부모님 언짢아하실 생각에 의무감으로 매년 6~8시간씩 걸려 부모님 댁에 내려가야 하고, 차례 후 이제 친정에 가보겠다는 말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속으로 꾹꾹 참는 82년 김지영들 말이다.
일주일 후면 설 명절이다. 추석이나 명절에 꼭 젊은 부부들을 본가에 오라고 해야 하는지, 결혼한 젊은 부부가 부모님을 뵈러 간다면 왜 항상 남편의 부모님 댁을 먼저 가야 하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요즘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데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하고있나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감사한 일이고, 왜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집안의 화목을 깨려하나 라는 분이 많다면 모든 관습과 전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던 과격했던 철학자를 소환해본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좀 바뀌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이제 양쪽 부모님께 더 잘하라는. 결혼을 하면 이제까지 도움을 받았던 부모님에게서 이제는 내가 잘해드려야 하는 부모님으로 관계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께도 효도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어 실질적으로는 이제 네 분의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부모님과의 관계설정은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제 사회에 첫발을 디디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정신없을 젊은 친구들에게 좀 부담되는 주문이 아닐까?
사상 최초로 자녀들보다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더 넉넉한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건강을 신경써야 하는 나이가 되시기 전까지는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효도의 의무를 좀 덜어줬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명절에는 자녀들이 방문하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부모 집을 방문하게 된다면 먹을 것 장만하고 치우는데 분주한 명절이 아니라 쉼과 부모의 사랑과 격려를 받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결혼은 연애와는 다르다. 서로 몰랐던 부분,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고, 지극히 예외적인 부부를 제외하고는, 자기 스스로에게 창피한 부분을 상대방에게 들켜서 민망하고, 또 상대방의 예기치 못한 모습에 실망하는 경험을 겪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일심동체가 되는 일에 도전해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편이 되어 줄 사람을 만들게 된다.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해가는 젊은 부부에게 명절은 두 사람의 문제에 가족의 문제를 추가하여 둘 사이의 문제를 복잡한 2차 3차 방정식으로 만드는 악명 높은 시간이다. 명절 후 이혼율이 높아진다는 통계는 진정 우리 사회의 부끄럽고 웃픈 현실이다.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으로, 우울감으로, 보상하기 위한 과소비로 이어진다. 극히 일부 정말 운 좋은 여성들을 제외하고.
2022년을 설날을 맞이하면서, 586세대들의 소소한 가정개혁 운동에 호소해본다. 우리는 70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 애들이 명절에 가지 않으면 부모님이 서운해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일년에 2번 전 국민이 편하게 쉬는 명절인데 집에서 편히 쉬거나 여행하면서 좋은 시간들을 보내라고 하고, 그래도 기어이 오겠다고 하면 와서 일하는 명절이 아니라 아들, 며느리, 사위, 딸 상관없이 똑같이 편하게 쉬고 재충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기성세대가 젊은 청년 세대에게 돈 안 들이고 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우리는 아직 젊고, 젊은 세대들에게 베풀 수 있는 행복한 세대이지 않은가? 당연히 이런 일로 사회의 불평등이 해소되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를 충분히 몇점 올릴 수 있다고 본다.
이제 결혼 생활을 만들어나가고 있을 92년 김지영들, 떳떳하게 남편들과 이야기하자. 명절 중 가끔은 재충전의 시간으로 쓰자고, 또 부모님 댁을 가게 되면 한쪽 부모님 댁을 항상 먼저 방문하는 이상한 문화를 깨자고 말이다. (결혼을 준비하는 예비부부는 당연히 결혼 조건에 포함 권장)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이냐 하고 핀잔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혼생활에서는 사소한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고 매우 어려운 문제인 것같다. 모든 일에 다정하고 나를 지지하는 남편이 큰 벽이었음을 실감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사회와 가정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숙제를 미리 못하고 이제까지 남겨주게 되어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92년생들은 용감히 쟁취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이에 대한 넛지로 새 정부의 명절 캠페인은 같이 일하기가 아닌, 명절엔 쉬기, 양쪽 부모님 댁 공평하게 방문하기가 되면 어떨까? 올해 명절은 굳이 오지 말고 푹 쉬라는 부모님, 작년엔 본가에 먼저 갔으니, 이번엔 장인어른 댁에 먼저 가자고 제안하는 남성들, 가족 내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자기주장에 따른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지는 김지영들이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되기를 바라며 설 연휴를 기다린다.
올해는 제발 명절 후 이혼건수가 늘어났다는, 명절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시어머니도 힘들다는 20년 넘게 들어온 기사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기도한다.